[정규재 칼럼] 서울시장의 자격
좌승희 교수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시장경제라기보다는 기업경제다. 옳은 분석이다. 개인의 작업, 즉 노동의 미분화 상태에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고도화된 상품과 서비스를 기업은 공급한다. 서울 서초동의 밤을 밝히는 고층 빌딩이 아니라면 삼성전자는 그토록 일사불란한 지휘 아래 수많은 전자제품의 생산과 공급을 세계적으로 결합해 낼 수 없다. 지식과 창의를 교환하면서 개인의 한계를 초월해가는 도시인의 생산 방식을 생각해보라. 고층 빌딩을 올려다 보면서 청년들이 가슴속에 벅차오르는 무언가를 느끼는 것은 자신도 그렇게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다는 뜻이다.

수만개 부품의 조립체, 현대 문명의 총화인 자동차를 생산하는 세계적 기업 현대차를 보면서 청년들이 느끼는 흥분감도 마찬가지다. 삼성동 한전 부지를 놓고 다투는 현대와 삼성은 지금 분업의 고도화 수준을 경쟁하는 중이다. 자본주의를 기업경제라고 한다면 문명은 곧 도시다. 도시의 수준이 문명의 수준을 결정한다. 도시문명이라는 말은 성립하지만 농촌문명이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생면부지의 수많은 개인과 기업들이 저마다의 지적 혹은 물질적 자산을 교환하면서 문명을 건설해가는 곳이 도시다. 작은 마을이 진화하고 자라나 도시가 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없다. 도시가 고도화될수록 인간관계는 다차원의 추상적 망과 점으로 진화해 간다. 그것은 도시의 도로망과 프랙털 구조다.

“마음에 맞는 사람 5명 있으세요?”라는 문구가 도로변에 도배질이다. 협동조합을 만들어 보라고 권유하는 서울시 홍보다. 2년 전 국회에서 법을 만든 이후 이미 4000여개, 서울에서만도 1300개 가까운 협동조합이 만들어졌다. 혹시 소액의 정부 지원금이라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필사적 노력이다. 그러나 협동조합이 도시적 생산방식일 수는 없다. 마음에 맞는 사람 5명이 아니라 생면부지의 500명, 5000명, 5만명을 협동하도록 만드는 것은 조합이 아닌 주식회사다. 지금 협동조합을 주장하는 것은 트랙터를 버리고 호미와 삽을 들자는 것이다. 반기업주의자들의 촌락 취향이다. 아니 그들은 실은 농촌의 구조학조차 알지 못한다.

서울시가 한때 열심히 선전하던 ‘도시농업’도 다를 것이 없다. 개인의 작물 취향이야 부러울 따름이지만 도시 땅이 그렇게 한가하지는 않다. 도시는 밀집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고생산성 산업이 아니라면 차라리 재개발을 앞둔 슬럼이 되는 것이 좋다. 농촌생활이 친환경적이며 도시가 에너지 낭비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서울시장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그런 지식으로는 도시를 경영할 수 없다. 도시는 시골보다 통상 두 배의 에너지 효율을 갖는 친환경적 공간이다. 압구정 재건축을 저밀도, 저층화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촌락 취향이다. 한강변의 성냥갑 아파트를 보고 답답증을 못 느낀다면 미(美)의식은 바닥이다. 도시는 높이가 본질이다. 단위면적에서 뽑아올리는 높이의 비례치가 바로 고도화의 측정 지표다. 스카이라인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동대문 디자인 센터에서 디자인은 사라지고 컨벤션만 남았다는 식이라면 역시 시장으로서는 낙제다. 이유가 없진 않겠지만 창조 산업은 사라지고 임대사업만 남았다면 실망이다.

도시는 또한 익명을 특징으로 한다. 익명성은 도회적 자유의 원천이다. 거리를 걸으며 형님, 아저씨! 하면서 머리를 박지 않아도 되는 것이 도시 젊은이가 원하는 자유로운 삶이다. 지연 혈연이 아니라 ‘자유로운 그래서 대등한’ 계약이 가능한 곳이 도시다. 안온한 전통적 삶이 좋다면 그 누구라도 시장이 아닌 이장에 출마하시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용산 사건’에서 범죄자와 경찰을 구분하지 못하면 시장의 자격이 없다. 재개발의 규칙을 바꿔 알박기를 보호하는 정도에 이른다면 이는 정의(正義)의 문제가 아니라 지력의 문제다. 도시의 공학과 미학, 즉 논리구조를 알아야 한다. 그게 서울시장이 되려는 자의 기본 조건이다.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