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기자들이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이제 한국 기자들이 질문해주면 좋겠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거푸 한국 기자의 질문을 재촉했다. “한국어 질문도 좋다. 통역이 있다”는 오바마의 말에 폭소가 터져나왔다. 중국 기자가 일어섰다. 아시아 기자들을 대표해서 자신이 질문하겠노라고…. 그는 한국 기자들도 그것을 원할 것이라며 건방을 떨었다. 오바마는 세 차례나 더 “한국 기자 없어요?”를 되풀이했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2010년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담장에서의 일이었다. 최근 EBS가 방영한 ‘왜 대학에 가는가’라는 시리즈물 제5편 ‘말문을 열어라’는 프로에서 예화로 든 이 동영상이 새삼 인터넷을 달구고 있다. 20여년 전 러시아 특파원 시절이 떠올랐다. 1993년이었지 싶다. 소련 붕괴 이후 KAL기 격추사건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재조사 결과가 발표되는 중대 기자회견장이었다. 나 자신을 포함해 한국 특파원 그 누구도 거의 마지막까지 질문하지 않았다. 당연히 한국 기자들이 회견을 주도했어야 했다. 물론 질문권을 받는 순간 수십대 카메라들이 조명을 켜면서 쇄도하는 그런 분위기였다. 질문을 세 개만 더 받겠다는 순간 손을 들었지만 터키 기자가 낚아채 갔다. “이제 두 개…”라는 순간 손을 들었다. 나는 한국 정부가 조사결과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 국제소송 가능성 등에 대해 물었다. 답변은 실망스러웠지만 기사는 쓸 만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회견이 끝나고 한국 특파원들은 대사관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모 특파원이 정규재의 영어가(질문은 영어로 했다) 문법에 맞다 틀리다로 제 잘난 시비를 걸던 끝에 기어이 다른 특파원에게 얻어맞는 일이 터지고 말았다. 쓰디쓴 웃음이 나왔다. 지나간 추문은 누워 침뱉기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한국 기자들은 영어가 서투르거나 부끄러움 때문에 국제 회견장에만 가면 손이 오그라드는 것일까.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들은 오히려 당초부터 질문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처럼 행동해 왔다.

잘난 척하기 좋아하고 온 동네 일에 간섭하는 것을 주특기로 하는 사람들이다.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안하무인이며 무식한 장광설을 펴는 데는 특히 뛰어나다. 사실 관계를 알기 위한 질문보다는 제멋대로의 주장에 안달이 난 사람처럼 행동한다. 보통의 기자회견에서도 질문보다 질타에 맛들인 기자들이 넘쳐난다.

최근의 보도만 해도 그렇다. 언론들은 13월의 세금폭탄 운운하면서 일제히 개편된 연말정산 제도를 성토했지만 그것이야말로 조삼모사의 원숭이 반응이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임대소득 과세 제도 역시 사실의 보도들이 아니었다. 10억원 전세금에 연 12만원을 세금 폭탄이라며 온통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말았다. 정부의 우왕좌왕도 문제였지만 언론의 두들겨 패기도 참, 대단했다. 쥐꼬리만한 트집이 있으면 그것을 문제삼아 기어이 밥상을 둘러엎고 만다.

돌아보면 그 호들갑이었던 쓰레기만두 소동이며 포르말린 통조림 소동 등은 모조리 오보였다. 광우병 보도 같은 사례들은 특정 언론사 전체의 집단적 그리고 악의적 광기였다. 채동욱 검찰총장 사건 당시 타사의 특종에 대한 질투로 눈이 멀었던 비열한 태도들은 실로 가관이었다. 기업 보도는 아예 까고 조지는 보도가 아니면 성립이 안되는 정도다. 정치적 성향과 당파성의 노예이며 사회를 신경증적 반응기계로 만들어 가는 전문가들이 바로 언론이라고 해야할 정도다. 그래서 처음부터 질문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민주주의를 정화하는 것이 언론이지만 한국 언론은 분명히 민주주의를 타락시키고 있다. 공론장은 점차 자극적 편향적 보도에 중독되고 있다. 인터넷 시대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애도 어른도 같은 한 줄이요, 가치와 지식의 세계에서조차 다같이 한 표다. 그렇게 가치를 다투는 공론은 사라지고 값싼 자극을 더하는 무지는 확산되었다.

누가 뭐래도 기자는 질문하는 사람이다. 차마 질문할 수 없어 점점 무식해진다는 농담의 주인공들인 국립 서울대 교수를 닮을 수는 없지 않나.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