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
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

“열정, 습관도 중요하지만 그중에서도 으뜸은 목표죠. 저도 목표 때문에 어려움이 닥쳐도 달려올 수 있었습니다. 동대문에서 의류 브랜드 사업을 꼭 해야겠다고 목표를 정하니까 꿈이 이뤄지더라고요. 기업가면 기업가, 엔지니어면 엔지니어, 꿈을 명확히 하고 달려나가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최병오 패션그룹형지 회장(61)을 아는 사람은 그의 배짱에 혀를 내두른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페인트 가게 사장이 됐을 정도로 뱃심이 두둑하다. 페인트 가게를 운영하던 외삼촌이 갑자기 돌아가시자 “열심히 하면 안 될 게 뭐 있겠나” 하는 생각으로 경영에 나섰다. 이후 녹록지 않은 현실 속에서 성공과 좌절의 롤러코스터를 탔지만 위기마다 그의 배짱은 빛났다. 신기술 개발에 집착하다 페인트 가게가 망한 뒤에도 전자오락실이나 빵집 등 전혀 경험이 없는 분야에 진출해 탁월한 장사 수완을 발휘했다. “아버지도 강단이 대단했는데 그 피를 이어받았다고 주변에서 말을 해요”라고 그는 말했다.

큰 돈을 벌고 싶어 스물아홉 살 때인 1982년 동대문 의류시장에 진출했다. 1평짜리 가게에서 시작해 승승장구했지만 10년 만에 거리에 나앉을 위기를 맞았다. 지인들에게 빌려준 돈이 ‘회수 불능’ 상태가 되면서 무일푼으로 전락한 것. 그러나 그는 배짱으로 정면돌파했다. ‘비버리힐스 폴로클럽’이라는 브랜드 사업권을 따내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경기 불황으로 모두가 위축돼 있던 작년과 재작년, 그는 4개의 기업을 인수했다. 패션 쇼핑몰 사업에도 진출해 매출 1조원을 넘어서는 중견기업의 자리에 올랐다. 패션 사업을 시작한 지 32년, 형지의 전신인 형지물산을 설립한 지 꼭 20년이 된 올해 초, 그를 서울 강남구 신사동 한정식집 ‘숭례문’에서 만났다.

○“기회는 날아가는 새와 같다”

“여기가 맛이 좋고 양도 많은데 가격도 괜찮아요. 난 비싸기만 한 데는 안 갑니다. 허허.”

일찌감치 사업 전선에 뛰어든 창업자 CEO(최고경영자)답게 최 회장은 왜 숭례문에서 보자고 했는지부터 설명했다. 맛과 양, 가격 외에 그가 주목한 것은 또 있었다. “숭례문은 평일에 비어 있는 인근 교회의 주차장을 이용해 발레파킹(대리주차)을 제공하는데 이 차별화 전략이 마음에 든다”고 그는 말했다. “남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발빠르게 행동에 옮기는 게 성공의 비결이잖아요. 형지랑 숭례문은 그런 점에서 비슷한 것 같아요.” 맨손으로 출발해 1조원대의 그룹을 키운 최 회장의 눈은 이렇게 남달랐다.

80㎏이던 체중을 최근 66㎏까지 감량했다. ‘독해도 너무 독한 것 아니냐’고 하자 “살을 빼겠다는 목표를 세웠으면 달성해야죠”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침을 꼭 챙겨 먹는데 밥 먹기 전에 채소를 한 접시 먼저 먹어요. 그럼 배도 부르고 속도 편한데 피부까지 좋아지거든요.” 1주일에 3~4일은 조깅을 하면서 체중을 조절한다. 전채로 나온 계절샐러드와 전복죽을 권하며 최 회장은 “아직 한창이니까 더 열심히 뛰려면 건강관리를 해야죠”라며 특유의 친근한 눈웃음을 지었다.

최 회장은 회사에 1등으로 출근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남보다 ‘반의 반 발짝’이라도 먼저 움직이자는 게 신념인데 몸에 배어서 그런지 새벽 출근 습관은 잘 바뀌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아침 기상 시간은 오전 4시 전후. 아무리 늦어도 7시 전에는 집무실에서 일을 시작한다.

잡채와 모둠전, 참치회, 문어숙회가 차례로 나오기 시작했다. 불황일 때 어떻게 4개 기업을 인수하게 됐느냐고 묻자 최 회장은 호박전을 한 점 집어들며 운을 뗐다. “한 대학에 강의를 갔다가 끝내고 나오는데 어떤 여대생이 뛰어오면서 ‘회장님, 기회는 날아가는 새와 같습니다. 저를 인턴으로 고용해주세요’라며 새 그림이 담긴 편지를 전해줬어요. 뒤통수를 한대 맞은 것 같았습니다.” 그는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가르침을 줬다는 그 여대생을 인턴으로 고용했다. 작년에 알짜배기 기업들이 매물로 나왔을 때 과감하게 인수를 결정한 것도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직원들에게 ‘행복’을 새해 키워드로 제시

어릴 적부터 고생한 최 회장에게 젊은 직원들이 나약해 보이지 않을까. 젊은 직원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고 질문하니까 그는 “지금까지는 젊은 친구들이 약해 빠졌다고 타박하고 헝그리 정신을 가지라고 다그쳤어요. 그런데 올해 신년사에서는 정반대로 ‘행복’을 키워드로 제시했어요”라며 웃었다. “살면서 행복한 게 제일이잖아요. 그래서 여러분이 행복하면 성과도 잘 나올 거라며 모두 행복을 위해 노력하자고 했죠.” 그랬더니 이전보다 실적이 더 좋아졌다고 한다. 그는 “세상이 달라졌는데 옛날 생각의 틀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실적이 나쁜 팀을 야단치는 대신 따로 불러 뮤지컬을 보여주고 고기를 사주기도 한다.

곰취, 고추냉이잎 등 산야초 쌈과 우렁무침, 감장아찌 등 이 식당의 대표 메뉴가 나오기 시작했다. 반질반질한 조약돌 위에 얌전히 올려진 곰취를 한 장 들어올린 최 회장은 “젊은이들이 저처럼 창업한 기업가들이 잘 되는 걸 꼭 봐야 합니다. 그래야 의욕이 생기고 도전을 하죠. 그래서 틈틈이 대학 강의를 나가서 ‘열정과 도전’을 주제로 제 얘기를 열심히 들려주는 거예요”라고 했다.

○14년 전 도와준 공장과 의리 지켜

생등심이 불판에 올려지자 최 회장은 “술은 잘 못하지만 반주를 하면서 이야기하는 걸 좋아한다”며 와인 ‘1865’를 주문했다. 대학에 강의를 가서는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했다. 그는 “살아온 과정을 진솔하게 들려준다”고 말했다. 또 “어릴 적에는 단 하나, 돈 좀 벌어봐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그러려면 겸손해야 하고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부지런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배운 것도 부족하고 키도 작고 눈도 찢어져서 인상이 나쁘기까지 하니 일부러 더 웃고 남보다 반 발짝 더 가자고 한 거죠”라고 담담하게 덧붙였다.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에서든 진실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공자말씀을 하는데 진짜 제 삶의 이야기를 곁들이니까 학생들이 참 열심히 듣던 걸요.” 그의 눈가에 트레이드 마크인 초승달 모양의 웃음이 번졌다.

최 회장이 사업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뭘까. 바로 신뢰다. 형지가 베트남 CNM의 최대주주가 된 것도 사람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됐다. 14년 전 형지가 외환위기의 여파로 돈을 제때 지급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도 CNM의 민상식 사장은 일을 맡아 옷을 공급해줬다. “이유는 없고 그냥 저를 믿었다고 해요”라며 그는 웃었다. 그 일이 고마워 후에 민 사장의 공장에 380억원을 투자, 설비를 최신식으로 바꿨다. 법인 이름도 두 사람 이름의 머리글자를 따서 C(최)N(&)M(민)으로 지었다. 지난해 12월 그가 의류산업협회장으로서 처음 ‘봉제인의 밤’ 행사를 연 것도 민 사장이 “좋은 일에 쓰시라”며 전해준 3000만원으로 마련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국제경영원(IMI)에서 성공 전략과 리더십에 대해 강연한 뒤 민 사장이 현금을 주더라고요. 돌려주려고 해도 안 받길래 잘 보관했다가 고생하는 봉제인들 송년회 자리를 만든 거죠.”

○“욕심 안 내고 한길 걷겠다”

어느덧 고기가 바닥을 드러내고 간장 양념에 자작하게 졸인 도가니수육과 차돌채소쌈, 된장찌개가 나왔다. 최 회장은 “여기 불밥도 줘봐요. 고슬한 밥맛을 꼭 보셔야지”라고 이 집 별미를 주문하고 올해 계획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올해는 샤트렌, 와일드로즈, 본 브랜드로 중국 사업을 시작할 겁니다. 그래서 상하이에 집을 얻으려고 자주 왔다갔다 하고 있죠. 아무래도 직접 챙겨야 마음이 편해서요.” 그가 패션쇼핑몰 바우하우스를 인수한 것은 앞으로 패션 브랜드만으로는 어렵다고 판단, 유통업을 포함해 라이프스타일과 연계한 사업을 제대로 해보기 위해서다. 남성복과 고급 여성복, 유통몰과 교복 사업을 인수한 데 이어 올해는 라이프스타일 관련 브랜드를 2~3개 추가로 인수합병할 계획이다.

와인잔을 마저 비운 최 회장은 “수없이 실패해봤기 때문에 욕심을 부리지는 않아요. 단 배짱 있게 잘할 수 있는 분야에서 도전하면서 최선을 다할 뿐이죠”라고 말했다. “올해는 또 제대로 멘토 역할을 해볼 계획입니다. 서울의 한 곳과 강의를 나갔던 전주대와 부산의 1~2곳 정도를 정해서 10명 안팎으로 창업에 뜻이 있는 학생들에게 밥도 사주고 구체적으로 창업에 도움이 될 만한 얘기를 해줄 거예요. 내수가 잘 되려면 결국 벤처기업에 뜻이 있는 젊은이가 늘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2, 제3의 최병오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하하.”

[한경과 맛있는 만남] "남보다 '반의 반 발짝' 먼저…열정만큼 중요한게 배짱"

■ 최병오 회장의 단골집 숭례문…한우 1++ 생등심과 푸짐한 한정식 '흐뭇한 맛'

[한경과 맛있는 만남] "남보다 '반의 반 발짝' 먼저…열정만큼 중요한게 배짱"
최상급 한우 1++ 생등심과 정갈한 한상 차림을 맛볼 수 있는 한정식집. 저녁용 한우 1++ 생등심 코스는 1인분(150g)에 6만7800원으로 전채(죽, 계절샐러드, 모둠전, 잡채, 육회, 참치회 등), 정찬(산야초 쌈, 우렁무침, 물김치, 감장아찌, 도가니수육, 차돌채소쌈, 된장찌개 등)이 포함된 가격이다. 고기만 따로 주문하면 한우 1인분(150g)에 4만2800원. 점심 때는 전골로 끓여주는 생불고기(미국산) 한상 차림이 1인분(180g)에 2만원, 한우를 쓴 것은 2만9000원(150g)이다. 단품 가운데 일명 ‘불밥’(불고기채소볶음밥)이 별미다. 고슬고슬한 밥을 불고기, 각종 채소와 함께 철판 위에서 볶아 주는데 3~4명이 먹을 수 있는 양인데도 가격은 1만원. 독립된 방이 35개나 있어 회식하기에 좋다. (02)515-5544

■ 최병오 회장 약력

▶1953년 부산 출생 ▶1972년 페인트 대리점 운영 ▶1980년 제과점 운영 ▶1982년 동대문 의류업체 운영 ▶1994년 형지물산 (패션그룹형지 전신) 설립 ▶1996년 크로커다일레이디 라이선스 사업 ▶2006년 샤트렌 론칭 ▶2011년 한국의류산업협회장 취임 ▶2012년 남성복 전문기업 우성IC 인수 ▶2013년 대한상의 중견기업위원장 여성복 전문기업 에모다, 패션쇼핑몰 바우하우스, 교복 에리트베이직 인수 ▶2014년 스위스 아웃도어 와일드로즈 아시아 상표권 인수

민지혜 기자 sp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