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정희 기자 ljh9947@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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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대학에 갓 들어간 18세 청년은 첫 과제를 받았다. “될 만한 사업거리를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멋진 발표과제를 만들기 바빴다. 이 때 이 청년은 “컴퓨터에서 하드디스크가 없어지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모두가 인터넷을 통해 별도의 공간에 자료를 저장하는 것이다. 컴퓨터의 두께가 얇아지고 값도 내려갈 것이고 통합 관리도 쉬워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과제는 잊어버린 채 청년은 기업들에 전화를 돌렸다. 그리고 기업들이 얼마나 핵심 자료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지를 알아냈다. 자신의 아이디어가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청년은 바로 학교를 자퇴했다. 1학년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그리고 친한 친구와 함께 친구 부모님 집 한켠을 빌려 회사를 차렸다. 이때가 2005년이었다. 청년의 이름은 아론 레비. 그가 창업한 회사는 ‘박스(BOX)’다. ‘클라우드 저장 서비스’라는, 자료 저장의 개념을 바꿔놓은 회사다. 지금은 포천 500대 기업 중 495개가 박스에 자료를 저장한다. 개인 회원도 2000만명이 넘는다. 만 10년이 안된 지금 레비 최고경영자(CEO)는 1억달러(약 1100억원)가 넘는 재산을 모았다.

◆“얼마든지 거절당해도 좋다”

박스는 저장 공간을 제공하고 이를 관리해주는 회사다. 기업이나 개인이 자료를 작성한 뒤 인터넷을 통해 업로드하면 된다. 컴퓨터가 망가져도 자료는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해커의 공격을 받아 보안이 취약한 사원들의 컴퓨터에 담긴 자료가 유출되는 우려를 덜 수 있다. 컴퓨터 자체의 값도 크게 싸진다. 지금이야 마이크로소프트나 구글 등 대기업들이 모두 클라우드 저장 서비스 사업에 진출했지만 당시만 해도 혁신적인 아이템이었다.

레비 CEO는 여느 미국의 젊은 창업자들처럼 좁은 창고 같은 방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우리는 박스가 바꿔놓을 세상을 상상하며 흥분해있었고 어린아이처럼 밤낮없이 프로그래밍에 매달렸다”고 회상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인력 고용은 물론이고 데이터를 저장하기 위한 디스크를 사기 위해선 적지 않은 자금이 필요했다. 자금을 유치하기 위해 고향 LA를 떠나 실리콘밸리로 자리를 옮겼지만 창업 뒤 2년이 지나도록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레비 CEO는 “허름한 사무실에서 2~3일씩 밖으로 나가지도 않은 채 일만 했다”며 “내가 받은 월급은 첫 2년간 500달러가 넘지 않았고 매 끼니를 편의점에서 파는 국수와 스파게티오(인스턴트 스파게티)로 때웠다”고 말했다.

수많은 투자자들과 기관을 찾았지만 문전박대가 이어졌다. 귀중한 데이터를 남의 손에 맡기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컸던 탓이었다. 투자자들은 레비 CEO에게 자료 보안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추궁했다. 젊은 나이에 좌절할 법도 하지만 레비 CEO는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박스의 잠재력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포기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는 것.

결국 레비 CEO는 자잘한 투자자들을 찾아다니기를 그만두고 ‘거물’과 직접 접촉하기로 했다. 그는 미국프로농구 구단인 댈러스 매버릭스의 구단주이자 수많은 스타트업 기업을 창업한 마크 큐반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편지에는 솔직한 심경을 담았다. “우리는 수많은 거절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바라보는 목표는 분명합니다. 얼마든지 더 많은 ‘노(no)’를 견뎌낼 수 있습니다.” 젊은 CEO의 패기가 큐반의 마음을 움직였다. 박스에 엔젤 투자(스타트업 지원을 위한 소액투자)를 하기로 한 것. ‘큐반이 투자한 기업’이라는 소문은 실리콘밸리 전체에 금방 퍼졌다. 그때부터 자금 모으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대기업의 영역 침범도 ‘문제없어’


박스가 이름을 알리자 대기업들이 재빨리 비슷한 분야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마이크로소프트 등 자금력을 갖춘 기업들은 막대한 공짜 저장공간 등을 가입 선물로 제시했다. 소비자들 입장에선 박스를 탈퇴하고 다른 쪽으로 옮겨가면 그만이었다. 레비 CEO는 재빨리 전략을 바꿨다. 대기업들과의 물량싸움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해 주 고객층을 기업으로 바꿨다. 기업들은 공짜 서비스보다 안전한 저장공간을 원했다. 박스가 그간 다져놓은 보안 노하우는 아무리 대기업이라도 빨리 따라가긴 힘들었다. 한번 서비스를 선택하면 쉽게 바꾸지 않는 기업들의 습성도 레비 CEO가 마케팅 타깃을 바꾼 이유였다. 일단 선점만 하면 장기적으로 이익을 볼 수 있었다.

전략은 적중했다. 이제는 프록터앤드갬플(P&G) 같은 소비재 기업은 물론 애플 등 대부분의 미국 대기업들이 ‘박스’에 자료를 저장하고 있다. 미국 기업들 사이에서 명성을 날리자 수요는 알아서 생겨났다. 2012년엔 영국과 유럽에 지사를 세우고 본격적인 유럽 공략에 나서고 있다.

◆“돈은 삶의 목표가 아니다”

이제 레비 CEO는 백만장자다. 그는 2012년 벤처기업 전문잡지 패스트컴퍼니와 컨설팅업체 딜로이트가 선정한 ‘최고의 스타트업 CEO’에 오르기도 했다.

대학들과 정보기술(IT) 관련 포럼에서 강연도 한다. 말 그대로 ‘유명인사’다. 하지만 그의 생활은 창업 당시와 크게 변한 건 없다. 사무실 근처에 조그만 아파트를 샀지만, 다른 IT거물들이 사는 ‘저택’과는 거리가 멀다.

여전히 1주일에 6일 이상 새벽까지 일하고, 식사는 스파게티오로 때우는 경우가 많다. 그는 “나의 목적은 사치가 아니다”며 “박스라는 위대한 제품을 더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하는 게 유일한 목표”라고 말했다.

최근엔 거래선을 맥도날드로 불러 햄버거를 먹으면서 계약서에 서명하기도 했다. 레비 CEO가 말하는 성공의 비결은 뭘까. “죽어라고 일한다”는 것이 최우선 원칙이다. 그는 “나는 누구보다 오래 일한다. 이 일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며 “성공을 위해선 사생활을 포기해야 한다. 예외없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원칙”이라고 강조했다. 그간 많은 대기업들이 수억달러 이상의 금액을 제안하며 박스를 사려 했다. 한방에 ‘거부’가 될 수 있는 순간이었지만 레비 CEO는 모두 거부했다. “나는 상사를 모시고 일할 만한 성격의 사람이 아닙니다. 누가 나처럼 밤새워 매일 일하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사람을 좋아하겠어요.”

그는 올해도 엄청난 돈을 벌게 될 것 같다. 지난달 30일 외신들은 박스가 올 상반기 중 기업공개(IPO)를 추진할 것이라고 전했다. 시장에서는 박스가 최소한 5억달러 이상의 돈을 모을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남윤선 기자 inkling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