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는 지난해 3월 전 세계 2000여개 납품업체를 대상으로 ‘분쟁광물’ 사용 여부를 조사했다. 분쟁광물은 아프리카 분쟁지역에서 생산되는 광물인 주석, 탄탈, 텅스텐, 금 4개 광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조사 결과 자사 납품업체들이 28개국 62개 제련소에서 분쟁광물을 공급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글로벌 2000여개 납품업체가 이들 제련소와 완전히 거래를 끊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납품업체들이 공급망을 바꿨는지 일일이 확인하기 어려운 실정”이라며 “제련소를 바꾸라고 권고는 하고 있지만 얼마나 따라줄지는 알 수 없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분쟁광물 초비상] '분쟁광물 시한폭탄' 안은 삼성·LG
13일 정부와 업계에 따르면 미국발(發) 분쟁광물 사용 규제가 임박하면서 삼성전자 LG전자 등 이들 4대 광물을 완제품에 사용하고 있는 수출 주력 기업들에 일대 비상이 걸렸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자국에 주식을 상장하고 있는 전 세계 모든 기업에 오는 5월 말까지 분쟁광물 사용 여부를 보고해줄 것을 요청한 데 따른 것이다. 국내에는 LG디스플레이 포스코 한국전력 등 미국에 상장돼 있는 제조업체뿐만 아니라 버라이즌 등 미국 통신사와 애플에 각각 휴대폰과 반도체를 납품하고 있는 삼성전자 LG전자 등도 모두 분쟁광물 미사용 증빙서류를 거래처에 제출해야 한다. 미국의 제너럴모터스(GM) 포드 등에 자동차 부품을 납품하고 있는 현대모비스 등 국내 부품업체들도 마찬가지다. 만약 미국 상장사가 SEC의 지시를 어길 경우 영업 금지 명령 및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다. 최악의 경우 상장이 폐지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한국 업체들과 거래하고 있는 미국 상장업체들은 지난해부터 4개 광물에 대한 철저한 관리감독과 함께 자신들이 SEC에 제출해야 할 서류준비 작업에도 적극 협력해줄 것을 강하게 요청해왔다.

하지만 국내 업계의 준비와 대응이 그다지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삼성전자의 경우 지난해 1차 조사를 마치고 다음달 추가 실사에 나서기로 했다. LG전자는 450여개 글로벌 납품업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61개 제련소에서 주석 탄탈 텅스텐 금을 공급받는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분쟁지역에서 생산되는 광물인지는 아직까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SK하이닉스만 54개 납품업체에 정보를 요구한 결과 분쟁광물을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이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2010년 미국에서 금융회사 규제를 강화하는 ‘도드-프랭크 법’이 제정된 데 따른 것이다. 월가 개혁을 목표로 하는 이 법에 분쟁광물 규제가 포함된 것. 아프리카 10개 분쟁국가에서 생산된 주석 탄탈 텅스텐 금 등 4개 광물 사용을 규제하자는 내용이다. 분쟁국가에서 ‘노예노동’ 등 반인권적인 방식으로 생산된 광물의 판매 자금이 해당 지역 게릴라나 반군에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SEC는 이에 따라 2012년 8월 관련 시행령을 발표했다. 시행령에 따르면 미국 증권시장에 상장된 기업들은 올해 5월31일까지 지난해 생산하거나 유통한 제품에 분쟁광물 사용 여부를 공시해야 한다. LG디스플레이, 포스코, 한국전력, SK텔레콤, KT, KB금융지주, 우리금융지주, 신한금융지주 등 8개 국내 뉴욕증시 상장사들은 관련 보고를 준비하고 있다.

이와 관련, 이달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14’에 기조연설자로 나선 브라이언 크라자니크 인텔 CEO는 “앞으로 노동착취나 유혈분쟁에 관련된 소재는 쓰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문제는 미국 상장기업뿐 아니라 상장기업에 납품한 1차 업체 및 기타 하위 납품업체에도 의무가 생기는 점이다.

게다가 SEC가 적시한 분쟁광물은 휴대폰 자동차 전자부품 등 국내 주요 수출품에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주석은 전자 납땜, 산업기기, 화학약품 등에 쓰인다. 탄탈은 휴대폰, PC 등에 사용되는 전자축전기, 초합금 제트엔진 및 터빈부품, 화학장비 등에 쓰인다. 텅스텐은 초경합금 공구, 전자총, 열흡수 장치 등에 사용되고, 금은 반도체 등에 쓰인다. 김정식 삼정KPMG 이사는 “식품과 섬유를 제외한 거의 모든 수출품에 다 해당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대기업조차 분쟁광물 사용 여부를 증명하기가 쉽지 않다고 토로한다. 우선 분쟁광물은 제품에 극소량이 사용된다. 1차부터 10차에 이를 수도 있는 협력업체를 정밀 조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광물을 직접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가공 형태로 들여오는 경우가 대부분인 데다 그마저도 협력업체의 협조가 없으면 조사하기가 쉽지 않다. LG디스플레이 관계자는 “전체 납품업체에 협조 공문을 보냈지만 회신율은 70%에 그쳤다”고 전했다. 증명을 하더라도 하위 협력업체의 정보 신뢰성에 대한 의문도 남는다.

대기업 사정이 이렇다면 중견·중소기업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다. 대부분 분쟁광물 규제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거나 대응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 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 관계자는 “미국 고객사의 요구를 맞춰주기가 쉽지 않다는 등 애로를 호소하는 문의가 쏟아지고 있다”며 “중소기업을 위한 분쟁광물 규제 대응 정책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더욱이 올해는 미국뿐 아니라 유럽연합(EU)도 분쟁광물 규제 법안을 통과시킬 가능성이 높다. 캐나다 호주 등도 비슷한 규제 도입을 추진하는 추세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부처 내부에서 분쟁광물 문제에 대해 우왕좌왕하는 모습도 보였다. 처음에는 분쟁광물 이슈를 광물 수급 문제로 보고 광물자원팀이 담당토록 했다. 하지만 지난해엔 미국 규제란 이유로 미주협력과로 업무가 넘어갔고, 지금은 전자전기과에서 맡고 있다. 예산도 정보통신진흥기금에서 충당하다가 이 기금이 신설된 미래창조과학부 관할로 넘어가면서 관련 예산은 ‘0’이 됐다. 산업부는 “내년부터 관련 예산을 편성해 대응해 나갈 계획”이라고 뒷북을 치고 있다.

■ 분쟁광물

conflict minerals. 콩고공화국 등 아프리카 분쟁지역 10개국에서 생산되는 주석, 탄탈, 텅스텐, 금 등 4가지 광물을 이르는 말. 게릴라나 반군들이 채굴 과정에서 민간인의 노동을 착취하고 있어 국제사회가 규제에 나섰다.

세종=조미현 기자 mwis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