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벽붕괴 25년, 게르만의 비상] 기계끼리 대화하는 공장…맞춤형 제품 '척척'…독일發 4차 산업혁명 온다
[장벽붕괴 25년, 게르만의 비상] 기계끼리 대화하는 공장…맞춤형 제품 '척척'…독일發 4차 산업혁명 온다
‘2024년 크리스마스, 독일 함부르크에 거주하는 뮐러씨는 세일기간을 맞아 백화점을 찾았다. 붉은색 방한복이 마음에 들어 구매하기로 했지만 가슴에 찍힌 브랜드 로고는 없었으면 좋겠다. 야외활동이 많아 본인이 비용을 내더라도 방수기능을 추가했으면 한다. 뮐러씨의 이 같은 요구사항은 사전에 입력해 둔 신체 치수와 함께 공장으로 전송돼 그에 맞는 옷을 맞춤 제작하기 시작한다. 이틀 뒤 뮐러씨의 집에는 이렇게 만들어진 방한복이 배달된다.

같은해 벤츠는 슈투트가르트 공장의 생산라인 한 곳에서 소형 SUV부터 대형 승용차까지 자사가 생산하는 모든 자동차 엔진을 만드는 생산모델을 시범 적용한다고 발표한다. 일직선의 생산라인을 따라 생산품을 조립하던 컨베이어벨트는 사라지고 생산품은 이제 필요한 공정에 따라 전용 운반장치를 타고 기기와 기기 사이를 이동한다.

많은 업종에서 재고 관리와 물류창고는 옛말이 돼 버렸다. 소품종 대량생산에 못지않은 속도로 고객 맞춤형 제품을 만들면서 개성이 반영되지 않은 기성품을 쌓아두는 것이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대신 공장을 나온 제품이 고객의 가정으로 바로 배달될 수 있는 택배시스템이 확대된다.’

제조업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뀐다. 독일 정부와 기업, 대학들이 5~10년 뒤 본격 상용화를 목표로 추진하고 있는 ‘인더스트리 4.0’이 꿈꾸는 미래다.

1784년 증기기관의 발명이 1차 산업혁명을 통해 영국을 최대 공업국으로 밀어올렸고, 20세기 초부터 본격화된 컨베이어벨트를 통한 대량생산(2차 산업혁명)으로 미국은 세계 최강대국이 됐다. 1970년대부터는 공장자동화를 통한 3차 산업혁명이 이뤄졌다.

독일은 ‘인더스트리 4.0’을 통해 ‘4차 산업혁명’을 이루겠다는 목표다. 독일 과학기술아카데미는 이를 통해 독일 산업의 생산효율을 30% 이상 끌어올릴 수 있다고 전망했다.

독일 카이저슬라우테른에 있는 스마트팩토리에서 인도 출신 연구원이 아이패드로 사이버물리시스템(CPS)을 통해 생산공정을 제어하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카이저슬라우테른=노경목 기자
독일 카이저슬라우테른에 있는 스마트팩토리에서 인도 출신 연구원이 아이패드로 사이버물리시스템(CPS)을 통해 생산공정을 제어하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카이저슬라우테른=노경목 기자

서로 대화하는 생산설비와 제품

인더스트리 4.0은 ‘사물 인터넷(internet of things)’을 통해 생산기기와 생산품 간 상호 소통 체계를 구축하고 전체 생산과정을 최적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전까지의 공장자동화는 미리 입력된 프로그램에 따라 생산시설이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인더스트리 4.0에서 생산설비는 제품과 상황에 따라 능동적으로 작업 방식을 결정하게 된다.

볼프강 발스터 독일인공지능연구소 소장은 “지금까지는 생산설비가 중앙집중화된 시스템의 통제를 받았지만 인더스트리 4.0에서는 각 기기가 개별 공정에 알맞은 것을 판단해 실행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 PC를 이용한 기기 간 인터넷의 발달과 개별 기기를 자율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사이버물리시스템(CPS)의 도입이 이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 모든 산업설비가 각각의 인터넷주소(IP)를 갖고 무선인터넷을 통해 서로 대화한다. 예컨대 지금까지는 현대차 쏘나타의 바퀴 조립 기기의 일감이 없어 놀고있을지라도 아반떼 바퀴 조립을 도울 수 없었지만 인더스트리 4.0에서는 사물 인터넷으로 요청을 받은 바퀴 조립 기기가 알아서 필요한 종류의 바퀴를 조달해 일을 돕는다.

인구 감소에 맞선 경쟁력 높이기

독일정부는 2011년부터 해당 프로젝트에 2억유로(약 2900억원)를 투자했다. 교육연구부를 주축으로 각종 연구기관은 물론 BMW와 제철사인 티센크루프, 글로벌 물류회사 DHL 등 대기업까지 참여해 개발그룹을 구성했다. 독일 각지에 5개 스마트팩토리를 짓고 인더스트리 4.0을 상용화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에른스트 부르크바허 경제기술부 차관은 “강한 제조업이 특징인 독일 경제에서 인더스트리 4.0은 미래를 열어가는 열쇠가 될 것”이라며 “지금 강하다고 독일 산업발전이 정체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고령화로 독일 제조업의 중요한 기반인 숙련공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도 이유다. 가임여성 1인당 1.4명의 아이를 낳는 출산율은 세계 최저 수준으로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현재 8000만명인 독일 인구가 2060년에는 6600만명까지 감소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인더스트리 4.0 개발그룹이 지난해 4월 내놓은 보고서는 “인더스트리 4.0을 통해 생산에서 노동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더욱 줄어들고 창의적인 기술개발과 혁신이 제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인구구조 변화에도 제조업 강국 위치를 유지하는 한편 낮은 노동비를 바탕으로 도전해 오는 중국 등 신흥국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한다는 전략이다.

‘표준화’가 첫 번째 장벽

인더스트리 4.0이 실현되려면 제품 판매에서 생산, 유통까지 전반적인 혁신이 필요하다. 판매단계에서 고객의 기호가 반영돼야 하며 생산된 제품은 중간 유통상을 거치지 않고 주문자에게 바로 전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당면한 과제는 기기 간 인터넷을 적용하기 위한 표준화다. 인터넷 인프라와 개별 생산설비의 독자적인 제어기능이 있더라도 상호 소통을 위한 방식이 통일돼 있지 않으면 유기적인 생산체계 구축이 불가능하다.

독일은 이 표준화 과정에서 새로운 사업 기회를 찾는다는 계획이다. 표준화 과정에서 독일 기업이 관련 운영체제(OS) 개발을 주도한다는 것이다. 구글과 애플이 스마트폰 OS를 양분하며 관련 시장에서 수익을 얻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발스터 소장은 “인더스트리 4.0으로 만들어진 생산시설은 스마트폰과 태블릿PC 등 모바일 기기를 통해 작동하게 될 것”이라며 “다만 여기에 쓰이는 OS는 애플의 iOS나 구글의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독일이 개발한 것이 쓰이게 된다”고 말했다.

자르브뤼켄=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

■ 글 싣는 순서
1. 제조업 '인더스트리 4.0' 시대
2. 제조업 파워는 RSG에서 나온다
3. 톱니바퀴 연구개발지원 시스템
4. 저실업 비결은 ‘시간제 일자리’
5. 도제-마이스터로 연결되는 교육훈련제도
6. 전 세계 바이어 빨아들이는 메세 파워
7. ‘3-필러 시스템’으로 최적화된 금융
8. 타협과 상생의 독일 정치
9. 지역균형발전과 드레스덴 성장비결
10. 통일의 경험-한국에 던지는 시사점


■ 특별취재팀

김낙훈 중기전문기자(팀장), 노경목 (국제부)·이호기 (정치부) 기자, 포스코경영연구소=김영훈·박형근 수석연구원, 최용혁 책임연구원

[장벽붕괴 25년, 게르만의 비상] 기계끼리 대화하는 공장…맞춤형 제품 '척척'…독일發 4차 산업혁명 온다
한경ㆍ포스코경영연구소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