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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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들이 우리 노동자들의 일을 대신해버린다. 기계가 많아질수록 노동자들의 일자리는 사라지고 생존은 위협을 받게 된다. 그러니 저 기계들을 부숴버리자! 그래야만 우리 노동자들이 잘살 수 있다.”

러다이트(Luddite)운동(기계파괴운동)을 주도했던 전설적인 인물 영국의 네드 러드가 운집한 노동자들을 향해 외쳤던 말이다. 이 운동은 19세기 초 영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등장한 방적기가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며 수공업 노동자들 중심으로 기계를 부수고 공장 소유주 집에 불을 지르는 등 폭동을 일으킨 사건이다.

기계가 일자리 뺏는다?…역사적 해프닝으로 끝난 기계파괴운동
러드는 보았다. 산업혁명과 더불어 기계가 등장하자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실업자로 전락하는 것을 목격했다. 기계들을 파괴해야만 노동자들이 잘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보지 못한 게 있었다. 그 기계 덕분에 새롭게 생겨나는 일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한쪽만을 바라본 외눈박이였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무시하게 되면 치명적 결과를 가져온다고 말한 사람은 프랑스 경제학자 겸 정치인 프레데리크 바스티아(1801~1850)였다. 가령 정부가 실업자들을 불러 모아 구덩이를 파게 한 뒤 다시 메우는 일을 반복시키면서 임금을 지급할 경우, 사람들은 정부가 일자리를 만들고 실업자를 줄이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구덩이를 팠다 메우는 사람들은 우리 눈에 분명히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좀 더 따져보면 정부가 주는 임금은 국민들로부터 거둬들인 세금이다. 납세자들은 이 세금을 내기 위해 그만큼의 투자를 포기하거나 소비를 줄여야 한다. 투자와 소비의 위축은 생산을 줄이고 일자리를 감소시키는 일이다. 이렇게 줄어드는 일자리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에 잘 보이는 효과만을 보고, 정부가 일자리를 창출한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한쪽 측면만 바라보는 러드식의 주장은 역사적 사실에 의해 철저하게 부정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만을 봐도 그렇다.

서양의 산업혁명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산업화도 새로 도입되는 기계가 노동력을 대체해나가는 기계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러드식 해석에 따르면 산업화 과정에서 대량의 실업이 발생해야만 한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은 그 반대였다. 1960년대 경제개발이 시작될 무렵 한국에서 전체 노동력의 약 60%는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농업 생산성은 매우 낮아 농업에 종사하는 노동력 대부분은 사실상의 실업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당시 도시 지역의 공식 실업률이 16~17%였다고는 하지만, 농업 부문 실업률까지 감안하면 전체 노동력의 약 절반 가까이가 사실상의 실업 상태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랬던 실업률이 2013년 현재 3% 이하에 머물러 있다. 기계화를 통해 실업률이 낮아진 것은 물론이고 국민소득 중에서 노동자들이 차지하는 노동소득분배율 또한 높아졌다. 1953년 25.8%에 불과했던 노동소득분배율은 1995년 이후 60% 내외를 유지하고 있다. 산업화를 통한 경제성장의 과실이 노동자들에게 많이 돌아간 결과다.

기계파괴운동을 이끌었던 러드는 상상도 못 했겠지만, 1980년대 컴퓨터 도입으로 타자기를 다루던 타자수 등 많은 일자리가 사라졌으나 삼성전자만 해도 10만명이 넘는 근로자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했고, 협력기업들까지 합치면 수십만명의 노동자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았다. 만약 컴퓨터가 일자리를 빼앗아간다며 컴퓨터 파괴운동을 벌였다면, 우리는 지금도 타자기를 두드리며 서류를 작성하고 글을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골목상권과 동네슈퍼를 살린다는 명분으로 대형마트나 기업형슈퍼마켓(SSM)의 출점을 통제하거나 영업 규제를 하는 것도 현대판 기계파괴운동이라 할 수 있다. 대형마트 규제가 골목상권과 동네슈퍼에 부분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대형마트나 SSM에서 생겨날 일자리가 영업 규제로 인해 사라지는 부분까지는 이해하지 못한다. 눈에 보이지 않아서다. 이런 규제로 인해 대형마트나 SSM과 협력관계를 맺고 있는 수많은 영세업자들과 농·어업인들이 겪게 되는 고통은 말할 것도 없다.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기계파괴운동이 벌어진 지 200여년이 흐른 21세기에도 비슷한 일들은 반복되고 있다. 현대판 러드들이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다. 이들은 컴퓨터나 로봇, 첨단통신기술 등이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이 직장에서 쫓겨나게 되는데, 그 영향력의 범위가 과거처럼 블루칼라 노동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화이트칼라 노동자와 변호사 회계사 등과 같은 전문직 종사자들에게까지 미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런 불행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첨단기술의 수용을 거부하는 이른바 네오러다이트(Neo-Luddite)운동이 나타나고 있다. 이들 신(新)기계파괴운동가들도 러드가 그랬던 것처럼 해프닝으로 기록될 게 분명해 보인다.

권혁철 자유경제원 전략실장
권혁철 자유경제원 전략실장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말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더 이상의 새로운 제품이나 새로운 욕구가 생길 여지가 없는 그야말로 더 바랄 것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아직도 수없이 많은 새로운 것들을 욕구하고 있고, 새로운 서비스가 충족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기존의 낡은 것들은 파괴되고, 새로운 제품, 새로운 생산기술, 새로운 시장이 끊임없이 나타날 것이고, 이로부터 새로운 일자리도 끊임없이 창출되는 ‘창조적 파괴’의 과정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 인간은 여전히 배가 고프다.

"사이비 경제학자여…보이지 않는 걸 보라"
바스티아의 경고


기계가 일자리 뺏는다?…역사적 해프닝으로 끝난 기계파괴운동
어린아이가 공을 차고 놀다가 옆집 유리창을 깼다. 이를 지켜본 한 경제학자가 이런 말을 한다. “저 아이가 경제를 살리고 애국을 한 셈입니다.”

의아해하는 사람들을 향해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유리창을 새로 갈아 끼워야 하기 때문에 유리를 만들고 끼우는 사람, 유리 원료를 대는 사람 등 관련 종사자들의 소득이 늘어날 겁니다. 늘어난 소득은 소비를 늘리고 전체 경제도 활성화돼 일자리도 함께 증가할 겁니다.”

이런 논리를 펴던 경제학자들에 대해 19세기 초반 프랑스 자유주의의 선구자 프레데리크 바스티아(사진)는 이렇게 꾸짖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유리가 깨짐으로써 앞서 말한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맞다. 그런데 ‘사이비 경제학자’들은 그 돈이 다른 유용한 곳에 쓰일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유리가 깨지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그 돈으로 다른 물건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개인이든 사회든 유리가 깨짐으로써 부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줄어들게 된다. 이게 보이지 않는 효과다.

특히 경제 정책의 경우 즉각적인 효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연속적인 효과가 나타나며, 즉각적인 효과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직시했던 사람이 바로 바스티아다. 그는 눈에 보이는 효과에만 주목하는 ‘사이비 경제학자’와 ‘진정한 경제학자’를 구분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사이비 경제학자들은 당장 눈에 띄는 하잘 것 없는 이득에 집착한 나머지 두고두고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 반면 진정한 경제학자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나타나는 더 큰 이득을 추구한다.”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주장들을 보자. 농산물 시장을 개방하면 우월한 경쟁력을 갖춘 외국산 농산물 수입으로 인해 국내 농가는 초토화된다고 한다. 근로시간을 단축해 남는 시간을 실업자들에게 주면 실업이 줄고 근로자들의 여가는 늘어 내수경기도 살아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바스티아가 이런 말을 들었다면 당장 “이 사이비들아”라며 질타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