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韓日 협력이익 극대화할 지혜를
한·일 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 해양 영토 분쟁에서 촉발된 중국과 일본의 지역패권 경쟁과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추진이 한·일 관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한·일 관계를 한국 측에서 보면 아베 총리와 일본 정치가들의 그릇된 역사인식 발언, 독도 동영상 유포, 우익 역사교과서 선정, 야스쿠니 신사 참배, 후쿠시마 원전폐기물 방출 은폐 문제 등이, 일본 측에서 보면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방문과 일왕 관련 발언, 일본대사관 방화사건의 용의자에 대한 범인 인도거부 문제 등이 신뢰 손상과 관계 악화의 원인으로 인식될 것이다.

한·일 관계는 이승만 정부 초기, 김영삼 정부 후기, 노무현 정부 후기, 이명박 정부 후기에 크게 악화됐는데, 이 네 시기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이 시기엔 두 나라의 힘의 균형이 상대적으로 대칭적이었다는 것이고, 둘째 양국 중 한 나라가 민족주의적 정체성과 일국주의 정책선호를 가졌을 때라는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의 한·일 관계는 대칭적인 힘의 균형 상태를 ‘정상 상태’로 받아들여야 한다. 한·일 관계는 한국에 불리한 힘의 비대칭적 상태에서 대칭적인 상태로 변화해 왔다. 물론 비교 기준에 따라서는 양국의 힘의 균형이 아직도 비대칭적인 면도 있다. 가령 달러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일본이 여전히 한국의 2배 수준이며, 한국의 대일 무역수지는 연평균 250억달러 수준의 적자를 누적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국제통화기금(IMF) 통계를 보면, 2012년 구매력 기준 1인당 GDP는 일본은 대략 3만6000달러, 한국은 3만2000달러다. 두 나라 국민의 실질적인 삶의 수준을 살펴볼 수 있는 이 통계를 보면 양국의 힘의 균형이 거의 ‘대칭적’이 됐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영토, 역사인식 차원의 한·일 분쟁도 ‘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양국이 대칭적인 힘의 균형 상태에 이미 도달했거나 곧 도달하려고 한다는 사실은 한·일 관계를 이제 더 이상 과거의 ‘한·일 밀약시대’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한국이 불평등한 우호관계를 더 이상 추구하지 않을 것이고, 일본은 한·일 관계의 특수성을 더 이상 배려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양국 정부와 국민들은 한·일 관계에 갈등과 분쟁이 존재한다는 것을 직시하고 이를 정상적인 상태로 받아들여야 한다.

영토, 역사인식 문제는 단기간에 근본적으로 해결하기가 매우 어렵다. 양국관계에서 최악의 시나리오는 영토, 역사인식 분쟁이 양국의 합리적 협력 관계까지 손상시키는 것이다. 즉, 양국의 갈등과 분쟁이 한·중·일 자유무역협정(FTA), 역내 통화협력, 북핵문제를 둘러싼 안보공조는 물론이고, 기업과 개인의 경제협력과 문화교류에까지 손상을 입히는 것이다.

한·일 양국은 물론이고 아시아 전체가 한·일 협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크다. 미국이 일본에 집단적 자위권 행사와 군사안보상의 역할 확대를 인정함으로써 미·일 동맹을 강화하고 있는 최근의 국제정세를 고려하면 한·일 관계의 복원은 전략적으로도 긴요하다. 따라서 양국 정치 지도자들은 한·일 관계를 ‘낮은 수준의 분쟁상태’로 관리하면서 협력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앞으로의 한·일 관계는 과거의 그것과는 구조와 질이 달라졌다는 새로운 인식, 즉 ‘대등성의 원칙’이 전제돼야 한다. 그리고 갈등이 생길수록 한·일 양국은 다양한 차원의 양자 외교의 틀을 더 활발하게 작동시켜야 한다. 중장기적으로는 역사인식과 영토분쟁을 다룰 수 있는 동아시아 다자외교의 틀을 구축하는 논의를 주도해가야 한다. 이슈별 문제해결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구조 변용에 대응할 수 있는 ‘대구상(grand design)’과 동아시아 외교협상을 위한 역사적 안목 및 정치적 역량이 절실한 때다.

양기웅 < 한림대 교수·국제정치학 kwyang@hallym.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