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취준생과 인사팀 '진실 게임'…"히말라야 정복? '등반 스펙 대행사' 있는 거 다 아는데"
하반기 채용 시즌이다. 가장 절박한 사람들은 기본 스펙 외에 나만의 열정과 패기를 보여줘야 하는 취업준비생이다. 하지만 인사팀 채용담당자들도 고단한 건 마찬가지다. 일이 많아 아침 일찍 나오는 것은 기본이고 낮에는 ‘캠리(캠퍼스 리크루팅)’를, 저녁엔 야근을 되풀이해야 한다. 수많은 지원자들 속에서 옥석(玉石)을 가리기 위해서다. 최대한 자신을 부풀려 홍보해야 하는 지원자들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진실’을 밝혀내려는 채용 담당자 간 웃지 못할 ‘진실게임’도 벌어진다. 채용 시즌마다 ‘죽어나는’ 김 과장 이 대리들의 사연을 소개한다.

○‘거짓말 보여요’…뛰는 지원자, 나는 기업

요즘 취준생들은 옛날 같으면 상상도 못할 다양한 활동을 한다. 천편일률적인 스펙 경쟁에서 벗어나 나만의 경험과 열정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토론회나 각종 공모전 입상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가 됐다. 히말라야산맥을 정복하고, 아프리카 오지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등 이색 경력의 소유자들이 수두룩하다. 한 대기업 채용 관계자는 “회사 입장에서 보기에도 대단하다고 느껴질 만한 경력을 가진 지원자가 많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진실’을 찾기 위한 숨바꼭질이 시작된다. 이런 특이한 경력들이 100% 진실만은 아닌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채용 담당자들이 ‘거짓’을 찾아내기 위해 오늘도 철야 작업을 하는 이유다.

대기업 A사 지원서류 자기소개서에 자신이 히말라야의 고산(高山)을 정복했다며 도전정신을 강조한 B군. 그러나 이 회사는 이미 하루 일정으로 히말라야의 산을 등반하고 사진까지 찍어주는 신종 스펙 대행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현지로 날아가 버스로 베이스캠프까지 이동, 불과 200~300m를 오른 뒤 ‘증명 사진’만 찍고 귀국하는 일정을 운영한다. 이런 대행사들이 국내에만 서너 개가 있다고. A사 채용 담당자는 수소문 끝에 이들 대행사를 알아냈고, 투어 코스를 분석한 결과 B군의 자기소개서 내용과 너무 흡사해 결국 B군을 서류에서 탈락시켰다.

또 다른 대기업 C사에 지원한 D양. 가냘픈 체구임에도 대학 동아리에서 10박11일 동안 아프리카에서 우물을 파는 봉사활동을 했다며 끈기와 열정을 자랑했지만 최종면접에서 거짓말임이 들통나고 말았다. 하필이면 면접관이 같은 학교의 해당 동아리 출신이었던 것. 낯빛이 변하는 D양을 보고 면접관은 뭔가 석연치 않다고 생각해 면접 후 인맥을 통해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면접관은 취재 결과 D양이 아프리카 봉사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고 B양은 면접에서 떨어졌다.

○“신입사원이 사장 앞에서 발표?”

대기업 E사 경영기획팀에 근무하는 조 차장은 최근 신입사원 면접에 갔다가 쓴웃음을 짓고 돌아왔던 기억을 지울 수 없다. 면접에 온 지원자 대부분이 조 차장이 일하는 경영기획팀 근무를 희망했는데, 그 이유를 들은 조 차장은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임원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하는 기회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사원 때부터 회사의 전략을 수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장님을 가까운 곳에서 보좌할 수 있어서죠”라는 순진한 말들이 쏟아져나왔기 때문.

조 차장이 내린 결론은 지원자들이 TV 드라마 속 회사 생활을 실제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환상의 대부분이 드라마에서 나온 기획팀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획팀이라도 신입사원이 주로 하는 일은 복사와 문서 정리인데…. 신입사원이 사장 앞에서 발표할 수 있는 확률은 1억분의 1도 안 됩니다. 드라마가 지원자들을 망쳐놓은 것 같아요.”

드라마 영향으로 입사 선호 부서가 바뀌는 일도 적지 않다. 대기업 F사 인사팀은 채용 시즌만 되면 그해 인기를 끈 직장 관련 드라마가 무엇인지 분석하는 게 습관이 됐다. 드라마에 나온 주인공이 속한 팀이 어디냐에 따라 지원자들의 입사 선호 부서도 바뀌기 때문이다.

인문·상경계의 경우 가장 선호하는 부서는 단연 기획팀. 그런데 2000년대 중반 인기 없던 영업팀의 지원자 수가 기획팀을 앞지른 적이 있었다. 그해 영업팀 얘기를 다룬 ‘신입사원’이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올해는 마케팅팀에 지원자가 가장 많이 몰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마케팅팀을 다룬 드라마 ‘직장의 신’이 큰 인기를 끌어서다. 한 인사팀 직원은 “제발 자신의 적성에 맞는 팀에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했다.

○“인·적성 검사 없는 곳에서 살고 싶어요”

현대자동차 입사 4년차인 김 대리는 취준생 시절 유난히 인·적성 검사 스트레스가 심했다. 인·적성 검사에서만 수차례 떨어진 경험이 있어 요즘도 가끔 악몽에 시달린다. 시험 종료 1분을 남겨뒀는데 풀지 못한 문제가 절반이나 남아 식은땀을 뻘뻘 흘린다거나, 컴퓨터용 수성 사인펜이 나오지 않아 펜을 마구 흔들다가 깨는 꿈이다.

‘이제 입사도 했으니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라고 생각하던 김 대리에게 다시 시련이 닥쳤다. 하반기부터 새로 바뀌는 인·적성 검사를 위한 ‘모의 테스트 대상’이 됐기 때문. 현대차는 인·적성 검사 이름을 HKAT에서 HMAT로 바꾸는 등 새 시험 유형을 도입했다. 1등에서 꼴찌까지 점수별로 순위를 매기는 것이 아니라 지원자들의 답안을 분석해 일정 패턴을 찾고 성향과 재능을 분석하려는 취지에서다.

상반기에 이뤄진 인·적성 검사 테스트 대상은 대리급 직원 2000여명이었다. 인사과에서는 “부담 없이 풀라”고 했지만 김 대리는 ‘혹시라도 인사고과에 반영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전전긍긍해야 했다. 구석에 처박아둔 예전 문제집까지 찾아내 다시 풀어봤다고.

“처음엔 제 생각대로 소신껏 답을 적어냈는데 계속 떨어지더라고요. 제 인성에 정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걱정이 돼 문제집만 몇 권을 풀었는지 몰라요. 그런 고생 끝에 겨우 입사했는데 또 인·적성 검사를 보라니 뜨끔했던 게 사실이죠…. 인·적성 검사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박한신/전설리/강경민/전예진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