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걸레든 비행기든…디자인은 예지력이다
“나는 언젠가 인간이 멸망한다면 이유는 상상하지 않았기 때문일 거라고 ‘상상’하곤 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상상하기만 하면 언젠가는 그것이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쥘 베른이 1867년 《지구에서 달까지》를 쓴 지 한 세기가 지난 1969년에 아폴로 11호가 발사됐다. ‘한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이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 베른의 말이 옳았던 것이다.”

[책마을] 걸레든 비행기든…디자인은 예지력이다
강원 강릉시 출신으로 영국의 대표적 디자인회사인 탠저린 입사 후 7년 만에 공동 대표가 된 디자이너 이돈태 씨는 《포어사이트 크리에이터》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는 이 책에서 ‘인사이트(통찰력)’를 넘어 이제는 ‘포어사이트’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포어사이트는 수치나 데이터 같은 정량적 자료뿐 아니라 경험과 직관에서 나오는 정성적 판단을 통해 미래를 상상하고 멀리 내다보는 능력이다.

기본적으로 디자인에 관한 책이다. 디자인을 중심에 놓고 이와 관련된 경영과 산업, 문화,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무릎을 탁 칠 만큼 ‘포어사이트’가 분명한 개념으로 다가오지는 않지만, 앞장서 개척한 자신만의 경험, 거기서 우러나온 생각과 조언들을 담담하고 진정성 있는 어조로 풀어놓는 덕분에 책은 잔잔한 울림을 준다.

디자이너 출신 조너선 아이브 애플 수석 부사장과 기아자동차의 패밀리룩을 디자인해 브랜드가치를 높인 피터 슈라이어 기아자동차 사장 등의 활약은 ‘디자인 경영’이 가치를 인정받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아직도 디자인을 ‘대충 그림 한 장 그려주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최고경영자(CEO)들이 많다고 말한다. 제대로 된 디자인 경영을 시작하더라도 1년 만에 손익분기점을 생각하며 조바심을 내고 성과를 수치화하려는 경우가 많다. 진정한 디자인 경영은 디자이너를 연구소 한쪽이 아니라 CEO 곁에서 직접 자문에 도움을 주는 위치에 두고 전사(全社)적인 의식 개혁을 함께할 때 가능하다.

그는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생각에도 의문을 표한다. ‘어떤 국적’의 회사와 디자이너가 디자인 했는가가 아니라 ‘어떤 시장’에서 어떤 전략으로 접근하는가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세계시장을 노리는 휴대폰에 한국 전통문양이나 이미지를 넣는 건 다른 문화의 소비자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다. 그는 진정한 ‘K디자인’의 힘은 한국적인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어 세계의 고객을 설득한다는 점이라고 설명한다. 한국인의 정서에는 다른 국가나 민족의 마음을 이해하고 헤아리는 포용력이 내재돼 있다는 얘기다.

처음 런던에 집을 마련할 때의 실수를 소개하며 자신만의 방법으로 극복하라는 메시지도 전달한다. 정원을 유달리 사랑하는 영국인들을 보며 정원이 넓은 집을 덜컥 계약해버린 그는 이후 주말마다 정원에 매달려야 했다. 그런데도 황폐해지는 정원 탓에 이웃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그러자 그는 자기 스타일로 문제를 해결했다. 정원을 밭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파와 깨 등을 심고 실용적인 채소밭을 만들어 이웃의 부러움을 샀다.

저자는 “영국에서 내가 잘하는 건 ‘버티기’였고 못하는 건 ‘발상’이었다”며 “자신이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못하며, 무엇을 발전시킬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책에는 상체가 더 큰 인체 특성에 착안해 완전히 누울 수 있는 항공기 비즈니스석을 만들어낸 사례부터 주방용품 업체의 걸레 디자인까지 그가 참여하고 배웠던 프로젝트가 생생하게 소개돼 있다.

저자는 “비행기든 걸레든 중요한 건 얼마나 근사한 것을 디자인하는가가 아니라 세계 1등 제품을 만들어 가는 데 기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 중심의 사고로 디자인한 영국의 횡단보도와 택시 승강장 사례를 통해 한국 공공디자인의 현주소에 대해서도 조언한다.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