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아베 총리 발언의 범죄적 모호성
이해할 만한 일인가? 일본 총리 아베 씨의 잇단 파격적 언행 말이다. 엊그제는 급기야 주권회복 운운하는 행사에서 두 손을 높이 들고 “천황 폐하 반자이!”를 외쳐 댄…. 결국 일본 지성을 유린하고, 아시아를 욕먹이며, 근대인 모두를 부끄럽게 만드는 언어폭력의 시리즈들이다. 한반도의 극좌 낙오자 그룹인 종북과 얼핏 비슷한, 논리의 단절이며 도덕 불감증이며 영혼의 공허함에 놀라게 된다. 혹시 아시아인, 아니 동북아인 일부에 이런 종류의 사고 경향성이 원형질 속에 박혀 있거나 유전체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절망적인 생각까지 해보게 된다.

20년에 걸친 긴 경제 불황과, 10개월에 한 번씩 총리를 갈아치우는 너무 잦은 정치 실패와, 급기야는 지진과 쓰나미와 괴멸적인 자연재해까지…. 그렇게 잇달아 얻어터지고 유린당한 끝에 나타난 어떤 일본인의 멘붕인지도 모르겠다. 어떻든 이제 아베 씨는 그나마의 편린의 지성조차 내동댕이치자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정치적으로든 법적으로든 침략을 확실하게 정의(定義)할 수 없다”는 아베 씨의 발언에 이르면 사실과 해석은 그 경계조차 모호해지고 만다. 이중의 언어요 악의적 상대성이며 범죄적 모호성이다. 침략전쟁을 갈등이론으로 환원하고자 했던 북한 이데올로기 유사 증후군이 일본국 차원에서 재연되는 꼴이다. 광기에 사로잡힌 민족주의의 외진 뒷골목 증세 말이다. 그게 중국을 포함해 동북아 전체로 번져 갈까 두렵다.

사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일본은 근대화 혁명을 제대로 겪어보지 못한 중세적 사회다. 여전히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신화를 지키고 있는 것만 해도 그렇다. 헌법 제1조에서 7조까지 덴노(天皇)를 규정해, 외형상은 입헌군주제 헌법인 것처럼 꾸미고 있지만 일본은 덴노를 정점에 놓고 있는 신국이요 샤머니즘의 국가다. 덴노는 서구 사회가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세속적 ‘왕’이 아니다. 덴노는 살아있는 신, 아마테라스오미가미(天照大神)의 후손이다. 일본인 모두가 이 천조대신의 자손들이요, 덴노는 현인신(現人神)이다. 신인(神人)이었던 환인의 직계후손이 지금 대한민국을 통치하거나, 아니라면 어떤 소설처럼 예수의 직계후손이 현대판 샤를마뉴가 된다는 식이다. 영화이거나 만화다.

우리가 아무리 일본과 일본인의 특수성(uniqueness)을 인정하더라도 결코 수용할 수 없는 것은 일본인들의 신도적 세계관이다. 역사 이래로 한 번도 침략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점, 덴노의 순수한 혈통이 끊어진 적이 없다는 점, 동일한 하나의 인종적 뿌리를 갖는다고 생각하는 점에 있어서 1억2700만 일본인은 하나의 원시 샤먼 종족이다. 샤머니즘에는 원래 선악 구분이 없다. 신도(神道)에는 길흉화복만 존재할 뿐, 선악의 절대적인 그리고 보편적인 기준이 없다. 지금 세계인들이 아베의 침략 부인 발언을 들으면서 느끼는 당혹감의 본질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일본에는 그래서 법치가 없고 혁명이 없고 민주주의가 없다. 당연히 선악에 기반한 정의관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야스쿠니에는 손에 피를 흥건히 적신 1급 전범(戰犯)의 영혼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합사되어 있고 그것에 태연할 수 있는 것이 일본이다. 자유 민주주의 혁명을 거치지 않았던 나라, 근대적 기술 합리성의 겉가죽 아래에 샤머니즘의 원형질이 숨쉬고 있는 나라가 바로 일본국이요 일본인이다. 아니 아베 씨는 지금 일본인을 그렇게 만들고 있다.

사실 민족은 18세기 이후에야 출생한 것이고, 억압받던 계층이 지배계급화하는 국민국가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만세일계의 긴 덴노 족보를 외울 수 있는 나라가 일본이다. 천황의 족보는 수도 없는 개작(改作)에 개작을 거친 것이지만 지금의 일본인들은 근 100년 이상이나 그것을 사실이라고 배우면서 자라났다. 천황주의가 민주주의를 억압,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인들이 히틀러의 반유대 민족주의에서 빠져나온 것과 달리 일본은 오히려 과거 부정의 몽롱한 세계로 회귀하고 있는 상황이다. 선악 개념은 법치의 개방된 질서 속에서 비로소 자라난다. 우리가 지금 종북을 보면서 느끼는 극좌 주술적 광기도 전근대성이라는 면에서는 신도와 역시 그 뿌리가 같다. 아베 증후군은 아시아에서 결코 작은 걱정거리가 아니다.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