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1990년 인간 생로병사의 비밀을 해결할 열쇠라는 희망을 품고 시작됐다. 총책임자 제임스 왓슨은 이 사업이 끝나면 주머니에서 CD 한 장을 꺼내면서 ‘이것이 바로 나’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새 천년이 시작될 무렵 드디어 인간의 DNA 구조 전체가 밝혀졌다. 그러나 그 DNA의 95%는 아무런 기능도 밝혀지지 않은 이른바 ‘쓰레기 DNA’로 판명났고, 유전자 정보는 ‘인간의 운명’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하지 못했다. ‘유전자가 나’라는 전제에서 출발한 사업의 결론은 ‘나는 유전자 이상의 존재다’로 끝난 것이다.

《불량 유전자는 왜 살아남았을까?》는 유전자의 눈이 아닌 사람의 눈으로 생로병사의 비밀을 탐구하는 책이다. 치과의사 출신인 저자는 의학을 인문학적 가치와 규범을 통해 이해하는 ‘인문의학’을 전파하고 있다.

저자는 과학, 의학, 인문학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됐을 때 몸의 고통과 질병에 대한 진짜 해법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19세기 세균의 존재가 밝혀지기 전, 의사의 ‘손 씻기’를 통해 산모 사망률을 낮춘 제멜바이스의 발견은 주류 의학계에서 철저히 외면당했다. 지체 높은 의사들은 제멜바이스를 해임하고 손을 씻지 않는 관행을 바꾸지 않았다. 일상적 삶의 지혜가 정밀한 과학보다 더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사회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루돌프 피르코는 전염병의 해결책으로 의학적 개입이 아닌 상하수도 시설 개선과 영양상태 개선을 제시했다.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많은 사람들이 좁은 공간에 모여 살게 되고 노동자들이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게 된 것이 전염병 창궐의 주요인이라고 본 것. 그는 더 나아가 사회 전체의 민주화라는 처방을 제시했다. 민주적 교육과 자유를 통한 번영만이 전염병의 진정한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현대의학은 가짜 약을 진짜라고 믿고 먹으면 실제로 병이 낫는 플라세보 효과를 일상적으로 경험하면서도 그것의 논리적 모순 때문에 과학적 탐구 대상으로 삼지 않고 있다. 저자는 플라세보 효과는 병이 들었거나 상처를 입은 가족과 동료를 정성껏 보살피던 조상들의 몸속에 차려진 천연의 약방과 같다고 말한다. 치료는 과학적 행위이고, 위로하는 것은 사회적·인간적 행위다. 플라세보 효과에서 과학과 인문학의 연결 고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특정한 유전자 세트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생활습관이나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유전자의 발현이 억제되거나 발현된다. 이는 생명이 사전에 결정돼 있기만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백지상태도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수명을 결정하는 것은 유전자 자체가 아니라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일지도 모른다고 저자는 추정한다. 유전자를 조작해서 오래 살겠다는 꿈의 실현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는 건 이런 까닭이다. 삶과 죽음의 원리는 단순한 생물학적 과정이 아니라 인류 탄생 이래 환경에 적응해온 우리 조상들의 경험이 응축된 과정이라는 얘기다.

최종석 기자 ellisic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