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동 금융위원장의 말에는 거침이 없다. 화법 자체가 직설적이다. 누가 뭐라든 소신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한다. 2011년 1월3일 취임 때부터 그랬다. “금융위의 존재감만으로 시장 질서와 기강이 설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게 취임일성이었다. 말뿐이 아니다. 정책을 결정하고 수행할 때도 마찬가지다. 저축은행 문제를 속전속결식으로 풀어나간 게 대표적이다.

천하의 김 위원장도 소신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이 있다. 대형 투자은행(IB) 육성을 위한 기반 마련이 그것이다. 그는 취임 초기부터 ‘한국형 헤지펀드’ 도입과 함께 대형 IB 육성을 강조했다. “세계로 뻗어가는 기마민족답게 금융에서도 삼성전자 같은 글로벌 IB가 탄생할 수 있다”고 자신하곤 했다. “대형 IB는 대한민국 미래의 꿈이다. ‘되겠나’ 하는 생각도 있지만 두고 보라”는 말까지 했다.

김 위원장 믿은 증권사 '발동동'

하지만 아니었다. 2011년 7월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마련했지만 끝내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IB는 글로벌 금융위기 주범’이라거나, ‘경제민주화에 역행한다’는 논리를 이겨내지 못한 탓이었다.

이 과정에서 김 위원장의 말만 믿고 3조6000억원을 증자한 KDB대우증권 등 5개 증권사만 어정쩡하게 됐다. 증자한 돈을 다른 데 사용하지 못한 채 국채에만 묶어두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기회비용을 송두리째 날린 건 물론 아니다. 지난해 기준금리가 두 번이나 인하되면서 ‘본의 아니게’ 짭짤한 재미를 봤다. 증권사 4곳 중 1곳이 적자를 내는 상황에서 가뭄에 단비와 같았다. “김석동 때문에…”라는 원망은 “김석동 덕분에…”로 바뀌기도 했다.

이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이다. 거꾸로 금리가 오르기라도 하면 이들은 손실을 입게 된다. 어정쩡한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자본시장법 개정안 통과가 절실하다. 비단 이들 증권사를 위해서만이 아니다. 국내 금융산업과 자본시장 발전을 위해서도 그렇다.

국내에는 62개 증권사가 있다. 이들이 하는 일은 비슷하다. 주식매매 중개나 주식 및 채권 발행 주관 등이 고작이다. 대형 증권사나 중소형 증권사나 다를 게 없다. 조그마한 국내 시장을 놓고 수수료 따먹기나 하면서 제살 깎아먹기 경쟁을 벌이고 있다. 국제적 대형 딜에서는 외국계 IB에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꿈 살릴 인수위원 있었으면

이런 구도를 타파해 보자는 게 대형 IB 육성방안이다. 대형 증권사는 해외에서 글로벌 IB와 싸우게 하고, 중소형 증권사는 국내에서 전문화하도록 함으로써 윈-윈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자는 취지다. 어디까지나 이론적이지만, 대형 IB가 활성화되면 중소·벤처기업에 대한 자금 지원이 크게 늘어나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할 수 있다.

“자본시장마저 삼성그룹이 독식하게 만들 순 없다”거나, “중소형 증권사를 다 죽이자는 말이냐”는 반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자본시장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경제 민주화를 견강부회한 논리에 다름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대로 놔두면 공멸하고 말 것”이라는 증권업계의 위기의식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18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출범하면서 김 위원장도 힘을 잃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본시장법의 조속한 개정을 통해 한국형 IB를 육성해야 한다”(1월2일 증권·파생상품 개장식)는 소신을 꺾지 않고 있다. 무난한 인선이라는 평가를 듣는 인수위원 중에서 대형 IB 육성을 위한 김 위원장의 소신을 대변할 만한 사람이 한 명쯤 있었으면 한다.

하영춘 증권부장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