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11일, 미국 경제의 상징인 세계무역센터(WTC)를 무너뜨린 것은 다름 아닌 단검 한 자루였다. 알카에다는 칼자루를 무기로 조종실을 점거했고, 얼마 뒤 연료가 가득 찬 비행기를 45도 각도로 비틀어 WTC의 고층을 들이받았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뉴욕 중심부는 난장판이 됐다. 뉴욕의 최첨단 방어 기술은 테러리스트들의 로테크(저급 기술)를 막아내지 못했다.

《하이테크 시대의 로테크》는 하이테크(고급 기술)와 로테크란 개념을 축으로 현대사회를 해부하는 문화비평서다. 저자인 허원순 한국경제신문 지식사회부장은 “현대사회는 하이테크를 기반으로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나가면서도, 로테크 역시 중요하게 빛나며 고유한 영역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현대사회의 다양한 분야를 하이테크와 로테크로 분석한다.

프로야구와 유럽 프리미어리그 축구가 하이테크 영역이라면 달리기와 걷기는 로테크로 볼 수 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PC를 통한 뉴스 검색이 하이테크의 생활 양식이라면 종이신문을 보는 것은 로테크의 한 축이란 게 저자의 설명이다.

저자는 “하이테크가 일상화된 시대지만 금융과 경제에선 로테크의 중요성이 더 커지고 있다”고 본다. 로테크 시대엔 돈이 많이 모자라면 남의 집을 빌려 세를 살았고, 갚을 수 있는 역량 내에서 은행 돈을 빌려 사는 게 집이었다. 반면 최근엔 하이테크 기술 덕분에 누구라도 분에 넘치는 고급 주택을 살 수 있고 그 바람에 관련 업계는 황제 같은 부를 누리게 됐다.

그러나 전문 종사자도 이해하기 힘든 첨단 금융상품은 2008년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촉발된 금융위기, 유럽 재정위기 등에서 드러났듯이 해변의 모래성처럼 금세 허물어졌다. 저자는 “너무나 빠르게 우리 곁으로 다가온 하이테크 시대에 로테크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이 필요하다”며 “기본을 되찾자”고 강조한다.

저자는 “하이테크로 빠르게 달려가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로테크로 회귀하는 현상도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한다. 슬로시티, 걷기 열풍, 템플스테이, 자연식 밥상, 웰빙 현상 등이다. 저자는 “크고 작은 국내외의 대형사고, 현대사회형 범죄, 연속되는 경제위기를 바라보면서 하이테크만 믿다가는 큰일나겠다는 자각일지 모른다”며 “이런 본능은 긴 세월 동안 인류가 생존해온 힘”이라고 지적한다. 현대사회는 이렇게 하이테크와 로테크의 영역이 나란히 발전해 간다는 것이다.

김인선 기자 ind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