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해 믿어지는 만큼만 쓸 수 있었어요. 억지로 극적인 희망과 화해를 말하기보다는 그저 혼자 간절하게 빛과 회복을 더듬어보는 겁니다. 그 이상을 쓴다면 기획이겠죠. 이 소설들은 어떤 기획이나 의도 없이 시처럼 이끌리는 대로 쓰여진 것들이에요.”

12년 만의 소설집《노랑무늬영원》(문학과지성사)을 펴낸 소설가 한강 씨(42·사진)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태어남으로써 자연히 주어진 삶.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일까. 이 소설집의 주인공들에겐 그렇지 않다. 이들은 삶이 주는 온갖 상처 앞에서 씩씩하기보다는 예민하다. 그래서 그들은 위태롭다. 하지만 온갖 고독과 엇갈림과 부재가 오히려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된다.

작가는 이들이 상처를 극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별다른 설명이나 희망으로의 전환 없이도 미약하지만 분명하게 삶에 대한 의지가 스미는 순간을 포착한다.

‘내가 몸을 일으키기 위해, 다시 혼자서 걷고 움직이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던 바로 그 무렵 그는 죽었다. 그의 긴 잠 속에 내 기억도, 설령 형체뿐이었다 해도, 영원히 묻혀버렸다. 그의 목덜미도. 만져보지 못한 솜털과 따뜻한 살결도. 오래 잊고 있었던 연민이 조용히 내 몸 안으로 들어온다. 어디서 들어오는 건가, 이 조용한 마음은. 어디서 이 마음-살고 싶다는,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울려 오는 건가.’(‘노랑무늬영원’ 중)

7편의 소설 속 인물들은 상처투성이다. 살아가는 게 버거워 죽음 너머나 다른 성(性), 다른 행성을 꿈꾼다. 예컨대 ‘에우로파’의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자에게 다가갈 수 없는 자신의 비겁한 인생을 극복하는 법은 그녀와 여장을 하고 사람들의 적의를 견디며 번화가를 걷는 것. 사랑을 얻기보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아지기를 택한 결과는 끝나지 않는 상실과 아픔이다.

그런 이들이 삶에 대한 의지를 연장하는 지점은 주로 상실해버린 과거에 대한 아련한 기억이다. “어쩌면 시간이란 흐르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함께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그 시간으로 돌아가면 그 시간의 당신과 내가 빗소리를 듣고 있다구요. 당신은 어디로도 간 게 아니라구요. 거긴 지낼 만한가요.”(‘파란 돌’ 중)

그는 “긴 시간에 걸쳐 있는 소설들이어선지, 책을 묶는 일이 어떤 작별처럼 무겁고도 홀가분하다”고 했다. 또 원래 소설 한편 한편에 얽힌 기억들을 모두 썼지만, 출간 직전 짧게 고쳤다고 했다.

“제 마음을 너무 많이 들키는 것 같아서…. 12년이라는 세월의 기억에 압도되는 느낌이었어요. 그런 경험과 기억, 느낌들이 녹아 있는 소설집입니다.”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