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민과 자연만이 숨쉬던 옛 북미 네브래스카 평원. 이 땅에 이주민이 들어오면서 자연과 인간의 평화는 깨지기 시작한다. 이주민들은 독이 든 음식을 뿌려 늑대를 멸종시킨다. 독을 먹고 죽은 늑대의 사체를 쪼아 먹은 독수리들도 피해를 당한다. 독수리들은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숲으로 이동한다. 먼저 평원을 버리고 숲에 들어온 큰 독수리 헤라는 조상 대대로 전해진 현명함을 전수받는다. 평원에서 거의 마지막으로 숲에 들어온 작은 독수리 베라는 헤라에게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하면 현명해질 수 있나요.”

《브릴리언트》는 큰 독수리가 작은 독수리의 수많은 질문에 답하고 되물으면서 작은 독수리가 똑똑해지도록 돕는 과정을 보여준다. 헤라와 베라가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빛나는 생각’이라고 할 수 있는 창조적 생각이 어디서 비롯되며, 그런 생각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지 알려준다.

“과학과 음악은 다른 것일까.” “끝없이 계속되는 멈출 수 없는 생각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저자는 우화소설을 통해 이런 생각에 대한 해답을 찾는다. 저자는 ‘안다’는 것과 ‘이해한다’는 것은 다르다고 말한다. 그냥 ‘아는 것’은 두뇌의 저장소에 가둬진 기억의 일부일 뿐이고, ‘이해하는 것’은 새로운 생각을 위한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창조적 생각은 ‘무엇을 생각하느냐’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이런 생각의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오감’과 ‘감성’을 설명한다. 오감은 세상을 보는 눈이다. 시각 청각 촉각을 느낄 수 있는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익숙한 주변의 것들을 다시 볼 때 새로운 생각은 시작된다. 이렇게 받아들여진 새로운 세계는 ‘감성’을 통해 ‘이성’에 전달된다.

저자는 “창조성은 아무것도 없거나 결핍된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 법칙을 깨기 위해서는 그 법칙에 능통해야 한다는 의미다. 저자는 “새로움에 다가가기 위해 감각을 최고의 상태로 다듬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빅토르 위고는 알몸으로 글을 쓰고,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연필을 아주 뾰족하게 갈고 서서 글을 쓰는 것을 선호했다. 미국의 유명한 시인 하트 크레인은 파티가 무르익을 무렵 파티장에서 빠져나와 타이프라이터로 달려갔다. 알렉상드르 뒤마는 시는 노란색 종이에, 소설은 파란색 종이에 썼다.

이들은 자신의 감각을 극한의 상태에서 활용했다. 저자는 이런 노력을 통하면 쉽게 감각을 최고의 상태로 만들 수 있다고 전한다.

저자는 “감각이 예민해진다는 것은 감성이 섬세해지는 것이고 이성이 예리해진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라고 지적한다. 무뎌진 감각은 모든 경험을 무심하게 흘려보낸다. 잘 다듬어진 감각에 의해 포착된 세계는 새로운 것으로 해석된다. 이런 훈련을 통해 이성이나 감성도 발전시킬 수 있다고 조언한다.

최종석 기자 ellisic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