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정책 지향성이 다른 보수와 진보가 똑같이 ‘경제민주화’를 대선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은 정치인들이 이 용어를 상당히 비논리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폴 로머 뉴욕대 스턴경영대학원 교수(57)는 오는 26일 한국경제신문 주최로 열리는 ‘코리아 비전 컨퍼런스(Korea Vision Conference) 2012’ 참석에 앞서 이메일 인터뷰를 갖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이 노력하는 사람들과 동등한 수준의 물질적 풍요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현재 전 세계에 엄습하고 있는 불황과 관련, 창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로머 교수는 “공동체를 개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새로운 기업가정신을 일으켜 기존 조직·사회·경제 시스템과 경쟁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주장의 배경에는 1980년대 ‘기술혁신은 경제주체들이 노력한 결과물’이라는 것을 수학적으로 입증한 후 스스로 주창했던 ‘내생적 경제성장론’이 있다. 그에게 경쟁력의 요체는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웨트웨어(wetware)’, 즉 사람과 지식이다.

▶유럽 재정위기의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나.

“유로화를 도입한 뒤 유로존에는 경제적인 붐이 일었다. 특히 남유럽에서 임금과 물가가 너무 빨리 상승했다. 그 결과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제품과 서비스가 경쟁력을 잃어버렸다.”

▶유로존이 재정 통합을 이룰 것으로 보는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혹여 재정 통합을 이뤄서 돈을 어떻게 거둬들이고(세금) 어떻게 쓸지(지출) 합의한다고 하더라도 중요한 과제가 남아 있다. 개혁이다. 재정 통합만으로는 꼭 필요한 개혁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남유럽의 부패를 줄이고 법이 더 강력히 지켜지도록 하는 것 등이다.”

▶그리스는 당면한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

“수출을 늘리고 실업률을 낮춰야 한다. 실업률을 낮추는 것이 세금을 거둬서 나눠 쓰는 문제보다 더 시급하다. 지금 그리스의 임금은 너무 높다. 법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그리스의 수출이 늘어나기 어려운 요인들이다.”

▶요즘 경제위기 여파로 정책당국자들의 고민이 많다. 국가와 기업이 다시 성장가도에 올라서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기술 진보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흔히 하드웨어에 집중한다. 하지만 내가 ‘웨트웨어’라는 개념을 제시한 것은 인간 뇌에 있는 축축한 ‘신경 조직’이 가장 중요한 기술 진보의 원천이라는 점을 환기하기 위한 것이다. 웨트웨어에 성공적으로 투자하는 나라가 경제 성장의 기회를 갖게 될 것이고, 모두가 부유해질 수 있다.”

▶웨트웨어에 성공적으로 투자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반드시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를 파는 기업을 갖고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나라의 기술을 사서 잘 활용하면 된다. 한국이 자동차를 만들게 된 것이 처음부터 관련 기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지 않나. 제약회사나 발전소를 운영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기술과 기업을 운영할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평소 창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뭔가.

“그래야 경쟁과 혁신이 일어나고 일자리가 생긴다. 중국의 덩샤오핑은 개방정책을 취하면서 노동자들에게 어느 기업에서 일할지 스스로 선택하도록 했다. 동시에 그는 중국 남부에 특별구역을 만들어 창업을 유도했다. 그렇게 해서 대표적으로 성공한 도시가 선전이다. ”

▶북한 개혁도 같은 방식으로 가능하리라 보는가.

“북한도 마찬가지다. 특별구역을 만들어 창업을 유도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다만 북한 정부에 대한 불신은 다른 문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위기를 낭비하면 안 된다’는 발언을 했는데.

“금융위기는 ‘특정 분야에서 강한(strong but narrow)’ 정부가 필요하다는 점을 일깨워줬다. 금융 부문과 관련해서는 법적·제도적으로 잘 정비된 규제를 만들고 실행되도록 해야 한다. 금융은 원자력과 비슷하다. 사회에 큰 가치를 제공하지만 위험하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금융위기는 기회이기도 하다. 실제 좀 더 유연한 금융 규제 시스템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고 본다.”

▶한국에선 ‘경제민주화’가 대선의 주요 쟁점이 되고 있는데 의견을 듣고 싶다.

“경제에 관해 말할 때 중요한 것은 단어의 정의를 명확히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늘 그 반대다. ‘느낌’은 있는데 논리적이지는 않은 단어들을 사용한다. ‘경제민주화’가 정확히 그런 종류의 단어다. 뭔가 따뜻하고 위안을 주는 말 같은데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진보와 보수처럼 서로 다른 정책을 갖고 있는 정당들이 똑같은 슬로건(경제민주화)을 내걸 수 있는 것이다.”

▶대개 경제민주화와 병행하는 단어들이 ‘공정’이나 ‘정의’ 같은 것들인데.

“대선 주자들이 이야기하는 경제민주화가 ‘동등한 기회’를 말하는 것이라면 기회의 평등을 지향하는 것이어야 한다. 결과의 평등을 지향해선 안 된다.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이 노력하는 사람들과 동등한 수준의 물질적 풍요를 기대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