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인맥·돈 '3無 감독'…'김기덕 스타일'로 정상 밟다
제69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김기덕 감독(52)은 스스로 “열등감을 먹고 자란 괴물”이라고 말했다. 지독한 가난과 부친의 학대로 점철된 유년기의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해병대에 자원 입대하고 제대 후 프랑스로 건너가 그림을 그리며 새 삶을 모색한 끝에 한국영화 사상 최초로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최고상을 거머쥐며 세계적인 거장으로 거듭났다. 미술과 영화를 독학으로 깨우친 그는 잡초처럼 살아온 삶을 극단적인 양상으로 녹여내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1960년 경북 봉화에서 태어난 그는 폭력적인 부친으로부터 극심한 매를 맞고 컸다. 가죽 허리띠로 등짝을 맞는 게 다반사였다. 가정 형편도 어려워 일반 고등학교가 아니라 공식 학력으로 인정되지 않은 농업학교에 갔다. 최종 학력은 중졸이 됐다. 졸업 후 서울로 상경해 공장에서 일하며 여러 가지 기술을 배웠다. 구로공단과 청계천은 김 감독의 어두웠던 젊은 시절이 녹아 있는 곳이다. ‘피에타’의 무대가 된 청계천에서 15세 때부터 공장 생활을 했다. 이후 구로공단에서도 노동자로 일했다.

그는 2001년 개관한 멀티플렉스체인 CGV구로에서 ‘나쁜 남자’로 관객과의 대화를 하면서 “감독 데뷔 전 노동자로 일했던 구로공단이 있던 자리에 생긴 극장에서 내 영화를 상영하게 되니 감개가 무량하다”고 말했다.

대학로에서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일을 하기도 한 그는 프랑스 남부의 한 해변에서 초상화 그리기로 생계를 꾸리며 그림에 몰두했다. 당시 프랑스에서 32세의 나이에 처음 본 영화 ‘양들의 침묵’과 ‘퐁뇌프의 연인들’은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한국에 돌아와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고 1995년 ‘무단횡단’이라는 시나리오로 영화진흥위원회 공모에 당선된다. 이듬해 첫 영화 ‘악어’를 연출, 감독으로 데뷔한다. 영화를 처음 본 지 불과 4년 만의 일이다.

체험을 바탕으로 사회 밑바닥의 음울한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극단적인 폭력과 성폭행, 엽기적인 행각, 변태적인 심리 등을 담은 그의 영화들은 여성단체의 반발을 불러왔다. 심지어 한 여성평론가는 “있으나마나 한 감독”이란 극언도 했다. 독학으로 익힌 작법은 충무로에서는 이단아로 취급당했다.

하지만 기존 영화들과 다른 그의 작법은 해외에서 먼저 주목받았다. 1998년 세 번째 작품 ‘파란 대문’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파노라마 부문 개막작으로 상영됐다. 2000년 ‘섬’이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고 미국 선댄스영화제에서 월드시네마상을 받았다. 같은 해 대학로에서 불과 세 시간 만에 찍었다는 ‘실제상황’도 모스크바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면서 예술성을 인정받았다. 2004년 ‘사마리아’로 베를린영화제 감독상을, ‘빈집’으로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을 각각 받으며 세계적인 거장 반열에 올랐다.

2001년 ‘나쁜 남자’는 국내에서 70만 관객을 동원하며 처음으로 흥행에 성공했다. 2003년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미국에서 상영된 한국 독립영화 중 최대 흥행을 기록했다.

해외에서 그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톱스타들의 구애도 이어졌다. ‘해안선’에는 장동건이, ‘비몽’에는 이나영이 출연했다.

김 감독은 “장동건, 이나영, 장첸, 오다기리 조 등 함께한 거의 대부분의 배우들이 먼저 같이하자고 제의를 한 것”이라며 “최근에는 미국 배우 윌렘 데포도 연락이 왔는데 아직 맞는 캐릭터를 못 찾아 대기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해외영화제에서는 배우들이 호텔방에 메시지를 놓고 간다”며 “나중에 잊지 않고 캐스팅 단계에서 떠올린다”고 공개했다.

김기덕은 순제작비 1억5000만원을 투입한 18번째 작품 ‘피에타’로 황금사자상을 받으며 20년이 채 안되는 영화 인생의 정점에 섰다. 그는 AF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피에타’는 나에게 새로운 출발이다”고 말했다.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