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16일 배임 등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되자 재계는 ‘뜻밖의 결과’라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일부 정치권이 경제민주화를 앞세워 반(反)기업정서를 조장하고 대기업 총수의 배임·횡령 등에 대한 처벌 강화를 추진하는 가운데 나온 판결이어서 기업들은 더욱 긴장하고 있다. SK 금호석유화학 오리온 등 총수가 재판 중인 곳은 이번 판결의 의미와 파장 등을 분석하느라 촉각을 곤두세웠다.

경제민주화 ‘희생양’되나

김 회장의 법정구속을 바라보는 재계의 심정은 ‘충격’과 ‘당혹’ 그 자체다. 한화를 비롯한 상당수 기업들이 1심에서 실형이 나오더라도 법정구속까지는 안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계는 ‘사법부의 판단은 존중하지만 아쉽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동근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은 “김승연 회장이 아랍에미리트와 이라크 등지에서 대규모 수주를 통해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노력해온 만큼 공로를 고려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경제가 어려운데 기업인을 법정구속한 것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재계는 정치권의 경제민주화 바람이 판결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고 있다. 이혜훈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이날 오전 “경영에 지장을 주기 때문에 안 된다는 핑계로 면죄부를 주는 일을 끊지 않으면 재벌 총수의 불법 부당행위를 근절시키기 어렵다”고 김 회장을 겨냥하기도 했다.

앞서 새누리당 경제민주화실천모임은 지난달 16일 기업인의 배임·횡령죄에 대한 집행유예 판결을 원천봉쇄하는 내용의 ‘특정경제범죄 가중 처벌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경제민주화 1호 법안으로 발의했다. 재계 관계자는 “정치권의 이런 움직임이 재판부에 부담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재판 앞둔 기업들 긴장

SK와 금호 등 총수의 재판을 앞둔 기업들은 ‘초긴장 모드’로 들어갔다. 사법부가 이번 판결을 앞으로의 기업인 재판 때 잣대로 삼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횡령·배임 혐의를 받고 있는 최태원 SK 회장과 동생 최재원 SK 부회장에 대한 재판은 다음달 중 1심 판결이 이뤄진다. 형인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과 분쟁 중인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의 공판도 진행 중이다.

박찬구 회장은 300억원가량을 횡령하고 미공개정보를 이용해 100억원의 손실을 회피한 혐의를 받고 있다.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과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도 판결을 앞두고 있다. 담 회장은 300억원대의 회사자금을 빼돌린 혐의로 작년 6월 구속돼 10월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은 데 이어 지난 1월 2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아 풀려났다. 검찰의 항소로 3심이 진행 중이다. 1400억원대의 회사자금을 빼돌린 혐의로 기소된 이 전 회장은 2월 1심에서 징역 4년6월을 선고받았으며 2심이 진행 중이다.

탈세와 재산해외 도피 등의 혐의를 받고 있는 선종구 전 하이마트 회장, 300억원대 CP(기업어음) 부정발행 의혹을 받고 있는 구자원 LIG 회장과 구본상 부회장 등도 검찰수사와 재판결과를 지켜봐야 한다.

대기업 관계자는 “죄가 있다면 처벌을 받는 게 당연하지만 경제 위기로 강력한 오너십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에 대기업 총수가 법정구속돼 안타깝다”며 “앞으로의 재판에서 기업인들이 지나치게 중한 형량을 선고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증거인멸이나 도주 우려가 없는 대기업 총수를 법정구속까지 시킨 것은 지나친 일”이라며 “배임에 대해서는 명확한 판단 기준이 없어 유무죄를 가리기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건호 기자 leek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