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일요일) 새벽 2시30분. 한 시간 후 열리는 런던올림픽 남자축구 8강전 영국과의 경기에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 중인 지동원 선수가 선발로 출전한다는 소식에 김 과장은 잠을 포기했다. 백화점에 근무하는 김 과장은 일요일에 출근해야 했지만 지 선수의 열렬한 팬이어서 경기를 놓칠 수 없었다. 김 과장의 ‘잠을 잊은’ 응원에 보답이라도 하듯 지 선수는 멋진 선제골을 터뜨렸다.

새벽 4시를 넘어 눈꺼풀이 감길 때쯤 박태환 선수가 수영 자유형 1500m에서 4위를 차지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지친(?) 몸을 힘겹게 일으켜 세워 컴퓨터를 켠 박 과장은 박 선수의 경기 동영상을 리플레이한다. 연이어 들려오는 펜싱 여자 에페 대표팀의 단체전 은메달 소식에는 반쯤 감겼던 눈이 번쩍 떠졌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운 뒤 출근한 김 과장. 동료 직원들은 이날 근무시간 내내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사무실 구석에서 쪽잠이라도 자야 오늘 밤에 있을 대표팀 경기를 응원하죠.”

4년 만에 돌아온 올림픽. 감동의 순간을 놓치기 싫은 김 과장, 이 대리들이 낮과 밤이 뒤바뀐 ‘올빼미’가 됐다. 한국보다 8시간 빠른 런던에서 열리고 있는 이번 올림픽의 중요 경기와 결승전은 대부분 우리 시간으로 새벽 시간대에 시작한다. 직장인들의 올림픽 시즌 에피소드를 모아본다.

◆송 대리의 외근이 잦아진 이유?

식품회사 시장조사팀 송 대리는 유통현장이나 거래처 등 국내 시장환경을 살피고 분석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올림픽이 시작되면서 송 대리의 외근이 부쩍 늘었다. 평소 1주일에 두세 번 밖에 나가 시장조사를 벌이던 그가 지난주에는 하루만 빼고 외근했다. 팀장에게는 정당한(?) 사유를 말한다. “요즘 불황이라 유통업계의 새로운 트렌드도 분석해야 하고, 휴가철이어서 휴가철 특수도 조사해봐야 합니다.”

실제 그렇까? 아니다. 송 대리는 외근을 핑계삼아 ‘적절한’ 휴식을 취한다. 새벽까지 올림픽 방송을 보느라 잠이 부족한 그는 근처 사우나나 마트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단잠을 잔다. 이렇게라도 해야 다음날 새벽 경기를 다시 볼 수 있으니까.

건설회사 직원인 김 대리는 소문난 축구광이다. 지난달 30일 월요일 새벽, 한국과 스위스의 축구 경기에 이어 박태환 선수의 수영 예선까지 보니 새벽 4시가 다 됐다. 축구 승리로 인한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한숨도 못 자고 퀭한 눈으로 출근했다.

사무실에는 김 대리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았다. 졸음을 참지 못해 몸부림치는 모습이 여기저기서 연출되자 담당 임원의 일갈, “너희가 좀비야? 정신 똑바로 차려!” 이들은 이후로 ‘올림픽 좀비’로 불린다.

◆“이어폰 빼 인마!”

평소 ‘바른생활 사나이’로 불리는 회사 장 주임. 매일 밤 10시면 잠이 드는 장 주임은 늦게까지 버티지를 못해 중요한 올림픽 경기를 놓치기 일쑤다. 대신 다음날 오전 회사에 출근해 인터넷으로 재방송을 꼭 본다. 동료나 상사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이어폰을 몰래 귀에 꼽고 녹화 중계를 보며 뒤늦게 벅찬 감동에 빠져든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경기에 사로잡혀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직장 선배나 팀장이 부르는 소리가 귀에 들어올 리 만무하다. 월요일인 6일에도 장 주임은 이어폰을 꼽고 흥분한 아나운서의 중계에 푹 빠져 직속 선배인 최 팀장이 찾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화가 난 최 팀장 왈 “장 주임~ 이어폰 꼽고 뭐하나? 안 빼!”

◆‘올림픽 타짜’와 ‘올림픽 식충’

중공업 회사에 다니는 오 대리는 사내에서 ‘승부사’로 통한다. 스포츠에 대한 지식과 관심이 많은 데다 승부 결과를 맞히는 데 최고로 통하기 때문. 이번 올림픽 기간에도 축구, 수영, 유도 등 많은 경기에 내기를 걸어 높은 승률을 기록했다. 그와 내기를 했던 팀 동료들 중엔 월초에 벌써 식권을 절반 이상 날린 이도 있다. 오 대리는 딴 돈과 식권으로 아이스크림, 맥주 등을 사지만, 돈 잃고 속 좋은 사람은 없는 법.

내기가 과열돼 팀원들 간 사이가 틀어질 조짐을 보이자 선배 박 과장은 분위기 전환을 위해 다른 팀과 큰 베팅을 제안해 성사시켰다. 다른 팀과 경쟁하며 팀원 간 화합과 결속을 다지자는 의도에서였다. 1주일치 식권을 모두 내기에 건 팀원들은 데이터 분석과 전문가 의견 수집 등을 함께하는 등 협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박 과장 팀은 내기에 져 식권을 깨끗하게 털렸다. 몇몇 직원들은 점심을 때우기 위해 친한 다른 팀 직원들이나 동기를 찾아다니는 ‘올림픽 식충’으로 전락했다. ○“안 보고 싶어도” “보고 싶어도”

대기업 마케팅팀에 근무하는 이 과장은 올림픽광인 아버지 때문에 고역이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이 과장은 퇴근 후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찍 잠자리에 든다. 하지만 스포츠광에다 축구팬인 그의 아버지는 모든 새벽 경기를 챙겨본다. “TV를 꺼달라는 말은 못하고 ‘아버지, 안 주무세요?’라고 물어봐요. 그럼 건강을 걱정하는 줄로 아시고 ‘아버지는 괜찮아’라고 대답하시죠. ‘아버지, 제가 안 괜찮아요’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 참고 다시 잠을 청합니다.”

하 대리는 승부욕이 강한 최 팀장 때문에 올림픽 경기도 마음놓고 못 본다. 그가 경기를 보거나 응원하는 팀은 매번 경기에서 지기 때문에 ‘불운의 아이콘’으로 찍혔다. 국가 대표팀이 경기에서 지고 나면 어김없이 최 팀장의 구박이 뒤따른다. 경기를 안 봤다고 거짓으로 둘러대도 귀신같이 알고 따지는 통에 ‘정말 나 때문에 지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든다고. “어느 순간부터 중요한 경기는 의식적으로 안 보게 되더라고요. 이기든 지든 일단 안 보는 게 맘이 편합니다.”

◆‘선수 빙의’

회사 이 과장은 올림픽 때문에 요즘 하루하루가 즐겁다. 투철한 애국심(?) 때문인지는 몰라도 각 종목에서 금메달을 딴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자신이 국가대표가 된 것 같은 ‘빙의 현상’을 겪는다. 진종오 선수가 사격에서 첫 금메달을 딴 다음날, 이 과장은 하루종일 손가락총을 조준하며 “야~ 진종오 같냐? 멋있지?”라고 말하고 다녔다.

김재범 선수가 유도에서 금메달을 딴 다음날은 더 가관이었다. 대화 도중 갑자기 후배 직원의 와이셔츠 깃을 잡더니 이렇게 말했다. “김재범 경기 봤어? 업어치기 한번 해볼까, 나도?” 당하는 후배들은 속으로 짜증이 나지만 웃고 넘길 수밖에. 하지만 불안해지는 마음을 어쩔 수 없다. “장미란 선수 경기 다음 날에는 연차를 써야겠군. 저러다 우리를 번쩍 들지도 몰라….”

김일규/윤성민/강영연 기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