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 잠깐 거기서 기다려. 내가 그쪽으로 갈게.”

갑자기 걸려온 전화에 달랑 재킷만 걸쳐 입고 사무실을 나서는 주인공.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유 대리는 드라마 속 이런 장면이 가장 부러우면서도 어이없다. 회의나 보고 중간에 혹은 프레젠테이션 도중 전화 한 통화에 회사를 뛰쳐나가다니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는 걸까.

“현실에선 정말 급한 집안일이라도 상사에 대한 보고가 먼저죠. 바이어가 급하게 찾는다고 해도 회사 복귀 예정시간까지 일정에 올려놓고 나가는 것이 기본이에요.”

드라마 속 김과장이대리와 현실 속 김과장이대리의 삶은 왜 이렇게 다른 걸까. 드라마에선 신입사원이 사장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지만 현실의 신입사원은 신년하례식 등을 제외하곤 사장 얼굴을 보기 힘들다. 드라마 속 ‘실장님’은 30대 초반에 슈트를 입고 여사원과 연애를 하지만 현실 속 실장님은 40대 후반에 주로 회사 안에서 슬리퍼를 신고 매일 밤 회식을 한다. 현실과 드라마의 괴리에 얽힌 직장 내 에피소드를 모아 본다.

◆장동건 따라하다 망신살

인기 TV드라마 ‘신사의 품격’에 푹 빠져 사는 유통회사 김 대리. 재킷에 커다란 옷핀 액세서리를 과감히 달고 패션감각을 뽐내는 드라마 속 장동건 스타일에 반했다. 김 대리는 수소문 끝에 그 옷의 브랜드를 파악했지만 옷핀 2개 값만 100만원이 넘는 명품브랜드였다. 너무 비싼 나머지 명동에서 장동건 스타일의 이미테이션 액세서리 옷핀을 싸게 샀다. 뭐 패션에는 꼭 값이 중요한 게 아니니까.

재킷에 옷핀을 멋스럽게 달고 출근! 하지만 패션감각을 뽐낼 수 있을 것이란 그의 기대와는 달리 드라마 속 장동건 패션을 잘 알지 못하는 직원들에게서 놀림만 받았다. “김 대리~ 그 옷핀에 이름표 좀 달고 다녀.” “김 대리~ 너 수선집하냐?”

◆로망과 현실 사이

[金과장 & 李대리] 전화 받고 아무때나 나가는 李대리…현실서 그랬다간 "당장 책상 빼!"
고등학교 새내기 교사인 이모씨(여)는 학창시절부터 여선생님을 흠모하는 풋풋한 남고생들이 나오는 영화와 드라마를 보며 교사의 꿈을 키워왔다. 영화의 주인공처럼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 복도를 지나가면 남학생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그런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원피스를 입고 갔더니 그냥 쳐다보는 게 아니더라고요. 아예 복도 바닥에 찰싹 붙어 치마 속을 보고 거울까지 들이대더라고요. 그 뒤로 바지만 입죠.”

대기업 신입사원 송 주임은 회사 지하 커피숍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을 짝사랑하고 있다. 그녀와 관계를 발전시키고 싶었던 송 주임은 드라마 속 주인공을 벤치마킹했다. 시간만 나면 커피숍에서 차를 마셨다. 종종 말을 걸어보기도 하고, 커피가 맛있다고 칭찬도 하면서 말이다.

하루는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커피값과 함께 쪽지 한 장을 건넸다. “오늘 저녁 시간 어때요?” 일종의 ‘작업’이었지만 ‘약발’이 먹혀들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녀는 같이 일하는 남자 아르바이트 직원과 이미 눈이 맞아 사귀고 있었던 것. 송 주임은 그 후로 다시는 회사 커피숍을 이용하지 않는다고.

◆수용소 같은 피트니스센터

드라마 속 회사 피트니스센터에는 근육질의 남자 직원들과 날씬한 여직원들이 섞여 운동을 한다. 퇴근 후나 점심시간마다 운동을 하며 때로는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여직원들은 주로 딱 달라붙는 민소매 운동복에 타이즈를 입는다. 남자 직원들은 좋은 운동화를 신고 팔뚝엔 MP3플레이어를 차고 있다.

하지만 전자회사에 입사한 박씨가 경험한 회사 피트니스센터는 ‘이상이 아닌 현실’이었다. 사내 피트니스센터를 찾는 사람들은 차·부장급 이상이다. 직원용 운동복은 촌스럽기 그지 없다. “성별과 상관없이 학교 운동회에서나 볼 법한 헐렁하고 칙칙한 색의 체육복 상하의를 입고 운동을 하죠. 얼핏 보면 수용소 같습니다.”

◆통역이 필요한 해외영업팀장님

드라마 속 패션업체 해외영업부서에 근무하는 나 팀장. 해외 근무 경험은 없지만 탁월한 영업력으로 해외영업부서 팀장으로 발령받았다. 나 팀장뿐 아니다. 해외 담당 직원들은 대부분 유창한 영어솜씨를 뽐낸다. 중국어, 일본어, 러시아어까지 못하는 언어가 없다. 해외 바이어가 방문했을 때 유창한 외국어 실력을 유감없이 선보이며 시청자들을 매료시킨다.

현실의 나 팀장은 어떤가. 그냥 ‘영업 아저씨’일 뿐이다. 직원들을 모아 놓고 오로지 한국말만 한다. 가끔 한국말도 무슨 말인지 모르게 웅얼거려 직원들의 어려움이 크다. 해외 바이어를 만날 때는 영어 잘하는 직원을 데려나가 통역을 맡긴다. 해외 바이어에게서 전화가 오면? 이메일로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신데렐라는 없다

드라마 속 신데렐라 스토리에서 가장 흔한 여자 주인공의 직업은 패션디자이너 아닐까. 공부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예쁘고 여린 주인공. 여기에 미적 감각을 비롯한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디자이너에 대한 꿈을 키우고 해외 유학까지 다녀온 실장급 디자이너를 매번 꺾는다. 이 과정에서 주로 회장(오너)의 아들인 또 다른 ‘실장님’이 여직원을 돕는다.

현실은 어떨까. 한 중견 패션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는 박 과장은 이렇게 말한다. “대부분 패션 회사에는 한 번에 인생역전을 할 수 있는 사내 응모전도 없고 회장님 아들은 ‘실장님’으로 일하고 있지도 않아요. 그런 디자이너가 뚝 떨어진다면 말 그대로 낙하산이죠.”

◆드라마 때문에 오해받고

몇 해 전 아내들의 내조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내조의 여왕’을 제작지원한 식품회사 A사는 유명세와 함께 많은 오해를 받았다. 드라마 속 임원들이 대부분 퀸즈타운이라는 고급 아파트에 살고 직원들도 높은 급여를 받는 것으로 묘사돼 친구들과 친지들의 기대치가 높아져 버린 것.

하지만 이 회사 직원들은 대부분 평범한 소시민이다. 대부분 식품기업의 평균 급여 수준은 전체 대기업 업종 중 평균에 못 미친다. 이 회사도 마찬가지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사정을 자세히 설명하는 직원들도 있었지만 측은한 눈빛의 동정을 받는 게 싫어 한턱 크게 내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죠. ‘큰 돈을 써가며 이미지 버리는 드라마에 협찬한다’며 직원들 사이에선 한동안 좋은 술 안줏거리였습니다.”

강영연/고경봉/윤정현/강경민/정소람 기자 yy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