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에는 대개 말세론이 있다. 수백 년 전에도 천여 년 전에도 자신이 사는 세상은 늘 말세라니, 세상은 발전해 간다고 생각하는 지금의 상식으로는 얼른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을 말세로 인식함으로써 자신과 현실을 반성하고, 옛날을 추상(推上)하여 높은 자리에 앉힘으로써 흠결 없는 삶의 전범을 세울 수 있는 것이 말세론의 장점이다.

종교인들의 현실 참여가 부쩍 늘었다. 세상이 혼란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현실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는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시비와 갈등 속에서 사람들의 영혼은 쉴 곳이 없는데, 수행을 업으로 삼는다는 종교인들까지 싸움판에 끼어들어서야 되겠는가. 청허(淸虛) 휴정(休靜·1520~1604)은 《선가귀감(禪家龜鑑)》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옛날의 불법을 배우는 이들은 부처님의 말이 아니면 말하지 않았고 부처님의 행실이 아니면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보배로 여긴 것은 오직 불경의 신령한 글뿐이었다. 오늘날의 불법을 배우는 이들이 서로 전해가며 외는 것은 사대부의 글귀이며 간청해 받아서 갖고 다니는 것은 사대부의 시다. 심지어 그 표지를 울긋불긋하게 칠하고 그 시축(詩軸)을 좋은 금으로 꾸미며 아무리 많아서 부족한 줄 모르고 더없는 보배로 여기니, 아, 어쩌면 이리도 옛날과 지금의 불법을 배우는 이들이 보배로 삼는 것이 다른가.’

휴정은 불경의 신령한 글을 보배로 여긴다고 말한다.

‘내 비록 불초하지만 옛날의 배움에 뜻을 둬 불경의 신령한 글을 보배로 여긴다. 그러나 그 글이 매우 많고 대장경의 바다는 끝없이 넓어 후세의 동지들이 뿌리를 찾지 못하고 잎을 따는 수고를 면치 못한다. 그러므로 불서의 글들 중에서 요긴하고 절실한 것들을 수백 말씀을 모아서 종이에 쓰니, 글은 간약(簡約)하고 뜻은 두루 갖춰졌다 할 만하다. 만약 이 말씀들을 엄한 스승으로 삼아서 깊이 연구해 오묘한 이치를 얻는다면 구절마다 산 석가가 있을 것이니, 힘써야 할 것이다.’

휴정은 도를 닦는 사람을 숫돌에 비유해 이렇게 말 맺는다.

‘도를 닦는 사람은 마치 한 덩이 칼 가는 숫돌과 같아 이 사람도 와서 갈고 저 사람도 와서 가니, 자꾸만 칼을 가는 동안 다른 사람의 칼을 잘 들지만 자신의 돌은 점차 닳아간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와서 자기 숫돌에 칼을 갈지 않는다고 투덜대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휴정은 조선 중기의 고승이다. 서산대사(西山大師)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서 큰 공훈을 세웠다. 35세의 젊은 나이로 당시 불교의 최고 지도자 격인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에 올랐다가 2년 만인 1556년에 “내가 출가한 본뜻이 어찌 여기에 있겠는가”하고는 사임하고 금강산에 들어갔다.

조선시대에 승려들은 이름난 사대부들의 시문을 받아 모은 시권(詩卷)을 가지고 다니면서 자랑거리로 여겼다. 이런 풍습은 중국 당나라 때부터 이미 보인다. 조선시대에도 승려들의 신분이 낮아진 터라, 행각하는 승려들이 명사들의 시문을 받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고, 사대부들의 서찰을 전해주는 우체부 역할도 했다.

도를 닦는 사람을 숫돌에 비유한 글은 《치문경훈(緇門警訓)》의 ‘자수심선사소참(慈受深禪師小參)’에서 인용한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제쳐두고 부질없는 세상사에 관심을 두는 병통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다르지 않은가 보다.

오늘날 세상은 실리가 가장 큰 진리요 명분이 되었지만, 지식인도 진리와 명분을 양식으로 삼고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종교인과 다르지 않다. 남의 글만 외고 다니지는 않은지, 남의 밭에 가서 김을 매고 있지는 않은지, 자기 숫돌만 닳고 있지는 않은지, 세상을 바로잡는다고 아우성치는 지식인들은 반성해 볼 일이다.

이상하 < 한국고전번역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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