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3월 세계 유수 언론 기자들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힐튼호텔로 모여들었다. 지브롤터에서 막 결혼식을 마친 비틀스의 리더 존 레넌과 일본 행위예술가인 오노 요코가 놀랍게도 신혼 침실로 언론인들을 불러 모은 것이다. 기자들은 저마다 이 세기의 커플이 뭔가 재미있는 볼거리를 제공해주리라는 기대를 안고 앞다퉈 호텔로 들어섰다. 오노는 관객에게 자신이 알몸이 될 때까지 옷을 자르게 하는 ‘컷 피스(cut piece) 퍼포먼스’로 잘 알려진 인물이라 아마도 자신들 앞에서 과감한 ‘에로 신’을 보여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침실에 들어선 기자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싱겁게도 두 사람은 평범한 파자마 바람으로 기자들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둘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향후 활동에 대한 것이 아니라 뜻밖에도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며 세계 평화를 기원한다는 정치적 메시지였다. 둘은 그렇게 신혼의 핑크빛 무대를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침대시위의 장으로 삼았다.

이튿날 언론의 반응은 싸늘했다. 일본에서 온 마녀가 순진한 레넌을 꼬드겼다는 투였다. 반항적이고 불량기 많았던 더벅머리 청년이 평화의 전사로 탈바꿈한 것이었다. 레넌이 오노를 처음 만난 것은 1966년 런던의 인디카갤러리에서였다. 레넌은 전시를 보러 그곳에 갔다가 마침 그곳에서 전시 준비 중이던 오노와 마주쳤다. 이들의 관계가 급속히 발전한 것은 1968년 5월 레넌의 부인 신시아가 그리스 여행을 떠난 사이 레넌이 오노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면서였다. 신시아가 집에 돌아왔을 때 둘은 잠옷을 걸치고 있었다.

레넌이 오노에게서 발견한 것은 따뜻한 모성과 세상을 바꾸려는 여성답지 않은 강인한 의지였다. 부모의 이혼으로 이모 집에 맡겨진 그는 기가 센 다섯 여자 틈바구니 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이런 비정상적인 배경 속에서 그는 점차 세상에 대한 불만을 키워나갔고 때때로 그런 반감은 극도의 남성우월주의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런 태도는 오노를 만나기 전에도 여전해서 그는 “비틀스는 예수보다 더 위대하다”고 떠벌일 정도였다. 그러던 그가 평화주의자에 페미니스트라니!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그는 이름마저 존 오노 레넌으로 개명하고 남녀와 인종의 차별이 없고, 국가라는 울타리가 존재하지 않는 새 세상 ‘뉴토피아’를 건설하자고 권유한다. “모든 사람이 온 세상을 공유한다는 것을 상상해봐요”라는 ‘이매진(Imagine)’의 노랫말 속에 그런 변모된 레넌의 모습이 압축돼 있다.

그가 오노와 함께 결행한 침대시위는 인기인의 시선 집중을 위한 단발성 해프닝이 아니었다. 오노와 함께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2차 침대시위를 가졌고 이후 자신의 신념을 전방위 활동으로 확대해나갔다. 레넌은 비틀스 활동을 접고 오노와 함께 실험적인 음악활동으로 나아갔는데 이는 결국 비틀스 멤버들과의 갈등을 초래,그룹 와해의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한다.

둘은 세평에 아랑곳하지 않고 평화의 복음을 설파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선다. 1971년 12월 반전운동가이자 시인인 존 싱클레어 구명을 위한 자선공연을 펼치는 등 반전운동의 기치를 높이 쳐들었다.

이런 레넌과 오노의 활동은 당시 베트남전을 주도하고 있던 미국 닉슨 행정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1973년 3월23일 미국 정부는 자국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레넌에게 마약 소지 전력을 문제삼아 추방령을 내렸다. 다행히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이 사임함에 따라 포드 대통령은 추방령을 거둬들여 사태는 원만히 해결됐다. 그러나 이런 연속된 파란 속에서 둘 사이에도 점차 갈등이 싹튼다. 둘은 2년여 별거에 들어가고 그 사이 레넌은 메이 팡과 동거를 시작한다. 그러나 평범한 여성과의 생활 속에서 오노의 진가를 재확인한 레넌은 오노와 재결합한다.

재회와 함께 그는 아들을 양육하기 위해 모든 활동을 접었다. 아들에게만은 부모의 따뜻한 손길을 받은 적 없는 자신의 전철을 밟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아빠로, 남성주부로 5년의 세월을 보낸 뒤 1980년 레넌은 새로운 세상 건설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다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선다. ‘스타팅 오버(Starting over)’를 통해 팬들은 오랜만에 레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곡의 서두에 울리는 세 번의 종소리는 새로운 출발이 아닌 그의 생의 종말을 알리는 비극의 예시였던 걸까. 그는 레코딩을 마치고 오노와 함께 귀가하던 중 광팬이 쏜 7발의 총탄에 스러지고 만다. 아들을 보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던 길이었다. 그는 그렇게 마지막 순간 따뜻한 부정을 세상에 전한 채 스러졌다.

레넌이 우리에게 기억되는 것은 단순히 주옥 같은 음악만이 아니라 평화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눌린 자에게 희망을 심어줬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오노와의 정신과 열정이 결합된 사랑 속에서 영글고 꽃을 피웠다. 레넌의 사회에 대한 거친 반발심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그가 가진 명사로서의 장점을 활용, 이를 반전 평화 운동으로 유도한 오노라는 여성의 지혜로움도 함께 기억돼야 할 것이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