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내가 이승엽이고 박찬호야" 알고보니 장비 가격만 '동급'
“아이고, 이게 누구신가. 결승타점의 주인공, 김 거포 아니신가?”

점심시간에 회사 인근 식당에서 마주친 입사동기 오 대리가 나를 보고 반가워하자 주변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본다. ‘프로야구 선수인가’ 하는 표정이다. 좀 쑥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다. 어제 친 결승 2루타의 짜릿한 손맛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하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리그 홈페이지에 접속해 타율과 출루율 등을 체크한다. 전체 리그 선수 중 어느덧 10위권에 이름이 올라 있다. 팀내에서도 거포란 별명을 얻게 됐다. 2주 전에는 난생 처음으로 홈런을 치기도 했다. “네가 홈런 치면 회사에 떡을 돌린다”며 놀려대던 감독은 수십만원을 써야 했다.

○작년 신생팀만 3058개

김 과장과 이 대리들이 야구를 하기 시작했다. 막대 풍선을 들고 프로야구 경기를 찾아 목이 터져라 응원하던 이들이 직접 글러브를 끼고 배트를 움켜쥐고 그라운드를 질주한다. 어릴 적 ‘찜뿌’(고무공을 주먹으로 치고 달리는 놀이) 고수였던 박 과장도, 골목길 야구로 동네 유리창을 여러 장 박살냈던 정 부장도 야구 하는 즐거움에 푹 빠졌다. 사회인 야구리그 운영 사이트인 게임원에 따르면 현재 전국 야구 팀은 300여개 리그, 1만5000여개에 이른다. 사회인 야구 선수도 40만명에 이른다. 야구 열풍은 2000년대 중반부터 달아올랐다. 게임원 관계자는 “2004년에는 229개 팀이 신규 등록했지만, 2011년에는 새로 출생 신고를 한 팀이 3058개가 된다”고 말했다. 공 하나에 울고 웃는 김 과장 이 대리들의 플레이를 들여다보자.

○프로야구팀 입단 테스트를 방불

시스템통합(SI) 업체에서 파견 근무만 줄곧 하다가 올초부터 본사에서 근무하게 된 박 대리. 사내 야구팀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덥석 지원했다. 어릴 적 골목야구에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당장 팀내 4번타자 겸 선발투수가 될 줄 알았지만 웬걸…. 교체선수로 나가 첫 타석에서 삼진을 당하고 두 달 넘게 벤치에 앉아 있는 굴욕을 당했다. 박 대리는 이후 1주일에 한 번씩 전직 프로야구 선수가 운영하는 야구교실에 참가해 기본 기술을 배우고 있다. 남들이 보면 프로야구팀 입단 테스트라도 볼 기세다. “퇴근 후 아무리 피곤해도 훈련을 꼭 받으러 갑니다. 한 번에 10만원이 넘는 개인레슨을 받는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감독님, 여자친구가 구경오니 제발…”

야구동호회에서 감독을 맡고 있는 윤 차장의 메신저는 수요일부터 불이 난다. 토요일 경기를 앞두고 주전 자리를 꿰차기 위한 팀원들의 물밑 작업이 치열하다.

“저번에 보니 그 친구 2루수는 안 되겠던데요?”와 같은 험담형, “제가 요즘 야구교실에서 훈련 열심히 하고 있다는 소문 들으셨어요”와 같은 귀띔형, “올해 5경기 참가했는데 선발출장은 불과 2회밖에 안 됐다”는 통계형, “이번 경기에 여친이 구경 오기로 했다”는 동정심 유발형, “이번 경기도 못 뛰면 팀을 나가겠다”는 공갈협박형, “제발 한 경기만 뛰게 해 달라”는 읍소형까지 있다.

○이 배트가 얼마 짜린데…안 맞네?

정유업체 지방지사의 야구 동호회에서 뛰고 있는 송 과장은 타석에 들어서면 상대 투수가 흠칫 긴장한다. 한눈에 봐도 폼나는 팔꿈치 보호대와 발목보호대 등으로 무장한 데다 남들과 다른 배트에서 풍겨나오는 ‘아우라’는 꼭 프로야구 선수의 그것이다. 하지만 엉성한 폼으로 헛방망이질을 하면 금세 ‘하수’라는 게 들통이 난다. 송 과장처럼 직장인 야구팀에는 고가의 장비를 사들이는 이른바, ‘장비병’에 걸린 선수들이 적지 않다. 글러브는 10만원대로 충분히 살 수 있지만 맞춤형 수제 글러브는 50만원을 훨씬 웃돈다. 심지어 일본에 60만~70만원대 글러브를 주문하거나 해외 온라인 쇼핑몰을 통해 고가 배트를 구입하는 사람들도 있다.

○상무님, 제발 이제 내려오시죠

조선업체 김모 상무는 야구광이자 사내 야구팀의 최고참이다. 하지만 나이 탓인지 실력은 젊은 선수들을 따라가기 힘들다. 문제는 김 상무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한번은 팀이 10 대 3으로 크게 이기자 김 상무는 두 이닝을 앞두고 감독인 정 부장에게 압박을 가했다. 점수차도 나는데 오랜만에 투수로 등판시켜달라는 것. 상사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정 부장은 결국 김 상무를 마운드에 올렸으나, 사사구의 연속이었다. 김 상무는 교체하자는 감독의 눈치에도 투구를 고집하다 결국 5점을 내준 뒤 마운드에서 내려 왔으나, 그 탓에 팀은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다. 김 상무는 그날 이후로 사내 야구팀에서 자취를 감췄다.

○헉…프로야구팀인 줄 알았어요

회사의 규모 차이는 직장인 야구팀에서도 나타난다. 대기업의 경우 연간 100만~300만원인 리그 가입비를 지원해주고 팀별로 고가의 공용장비 구입비까지 챙겨주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전문 코치 비용을 대주고, 경기 때 차량 지원까지 해주는 곳도 있다. 하지만 중소기업 야구팀은 리그 가입비까지 팀원들이 갹출해야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선수층도 확연히 차이가 난다. 한 중소기업 야구팀원의 말을 들으면 직장인 야구에서도 대·중소기업 간의 갈등이 느껴진다. “상대팀 선수단 로고에 대기업 마크가 붙어있으면 솔직히 팀 분위기가 위축됩니다. 게다가 그 기업에 계열 프로야구단이 있어 프로팀과 비슷한 유니폼을 맞춰 입고 나올 때는 더 위축되는 것 같아요.”

○‘甲’과는 시합하기 싫다니까

광고 기획사 A사의 김 전무는 광고주인 B 회사 담당자를 만나러갔다가 얼떨결에 동호회팀 간 야구 시합 일정을 잡게 됐다. 김 전무는 친분을 다질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A사 직원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져도 그만’이라며 부담없이 시합에 나선 A사 타자들은 오히려 평소답지 않은 불방망이를 터뜨렸다. 경기 초반부터 A사는 큰 폭의 리드를 잡았고, B사 직원들의 표정은 굳어져 갔다. 사단은 4회 말 터졌다. A사 투수의 공이 그만 타자로 나선 B사 부장의 갈비뼈를 강타한 것. 시합 구경차 왔던 김 전무는 B사 부장을 인근 응급실로 모셔야 했고, 야구 시합 일정을 잡은 걸 뼈저리게 후회했다는 후문이다.

고경봉/강경민/강영연기자 kg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