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울리히 자이트 주한 독일대사 "韓·獨이 금융위기 넘은 건 강한 제조업 때문"
한 손으로 게 껍데기를 쥐고 속살을 발라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예전에 어른들이 가르쳐준 대로 엄지와 검지, 그리고 중지를 주로 써서 젓가락을 능숙하게 사용했다. 처음 접하는 외국인들이 공포마저 느낀다는 간장게장. 그가 서슴없이 메뉴에서 고를 때는 살짝 걱정도 했다. 하지만 기우였다. 흐트러짐 없는 자세와 논리적인 발언은 전형적으로 빈틈없는 독일사람인데 간장게장에 밥 한 그릇을 쓱쓱 비벼서 싹 비우는 모습은 영락없는 한국사람 같았다.

한스 울리히 자이트 주한 독일대사(60). 홍어삼합과 간장게장을 즐긴다는 그는 자신의 한국이름이 ‘사한울’이라고 소개했다. 사씨는 자이트라는 성에서 땄고 ‘한울’은 한스 울리히의 첫 글자다. 3년 전 한국 부임 초기 대구를 방문했을 때 지인이 붙여준 이름이란다. 대사관에서 작성하는 각종 공식 문서에 한글로 사한울이라는 서명을 남긴다는 자이트 대사는 능숙한 솜씨로 메모지에 ‘사한울, 주한 독일대사’라고 써보였다.

한스 울리히 자이트 주한 독일대사 "韓·獨이 금융위기 넘은 건 강한 제조업 때문"
자이트 대사가 찾은 단골집은 서울 신문로 서울역사박물관 안에 있는 한식집 ‘콩두 레스토랑’이다. 한국의 전통과 문물을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는 분위기에 반했단다. 다음달 16일 이임 날이 다가와서 그런 걸까. 말할 때마다 곧 떠날 한국과 한국음식에 큰 애정을 갖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는 탁 트인 바깥쪽 석탑을 가리켰다. “이 집은 창밖의 멋진 정원 풍경을 바라보며 전통적인 한식을 즐길 수 있는 곳이어서 종종 방문합니다.” 종업원이 들어오자 “약간 짙은 갈색이 도는 막걸리 주세요”라고 주문했다. 메뉴판을 보니 6년근 홍삼을 넣은 검은콩 막걸리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3년간 한국 생활에서 가장 인상에 깊었던 것을 물었다. 돌아온 답변은 역시 ‘첫인상’이 가장 강한 듯했다. “부임 전 3개월 동안 광주광역시에서 살았습니다. 전남대에서 학생들에게 독일어도 잠깐 가르쳤죠. 거기에서 한국어도 처음 배웠습니다.”

자이트 대사는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맛의 고장에서 한국 대표요리를 자주 접했다는 것입니다. 홍어삼합, 산낙지, 막걸리 모두 광주에서 처음 맛봤습니다. 전라남도에서 사는 것을 매우 좋아했어요.”

게장이나 삼합 같은 음식은 먹기가 어렵지 않느냐는 질문에 한국말로 “홍어… 홍어…” 하면서 처음에는 ‘충격’이었다고 말했다. 곧이어 그는 “음식을 먹지 못하면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할 수 없다”며 포항에 가서는 과메기를 먹고, 수원에선 수원갈비를 즐기고, 안동에선 찜닭을 경험한 게 큰 기쁨이었다고 답했다. “개고기 빼고는 거의 모든 한국음식을 잘 먹는다”는 우스갯소리도 곁들였다.

한스 울리히 자이트 주한 독일대사 "韓·獨이 금융위기 넘은 건 강한 제조업 때문"
한국과 독일 음식이 의외로 비슷하다는 설명도 이어졌다. 한국사람들이 회를 즐기듯 북부 독일 사람들도 날생선을 잘 먹는다는 것. 독일의 ‘자우어크라우트(양배추를 절인 음식)’는 한국의 김치에 해당하는 요리라고 소개했다. 또 독일사람들이 일종의 족발 요리인 슈바이네학세에 자우어크라우트와 독주인 ‘슈납스’를 곁들여 즐긴다고 했다. 족발에 김치와 소주가 짝을 맞추는 한국음식의 판박이라며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한국의 폭탄주와 비슷한 술문화가 독일에도 있다며 독특한 주법(酒法)을 소개하기도 했다. “맥주 잔과 조그만 슈납스 잔 등 두 개의 잔을 한 손에 쥐고 동시에 마시는 걸 ‘뤼트예 라게(Luettje Lage)’라고 부릅니다. 실수하면 옷에 술을 쏟지요. 한국의 폭탄주보다는 약간 고난도 기술을 요하는 음주법입니다.”

화제가 술로 번지자 곧바로 막걸리 예찬이 쏟아졌다. 막걸리는 전 세계에서 보기 드문 독창적인 술이면서 몸에도 좋아 글로벌 시장에서도 잘 팔릴 것으로 확신한다는 설명이었다. 주말이면 북한산 북쪽면을 즐겨 오르곤 하는데 등산을 마친 뒤 아내와 함께 삼겹살과 막걸리를 즐긴다고 했다. 막걸리뿐 아니라 향이 좋은 동동주를 즐길 수 있는 용인민속촌도 자주 찾는 곳이란다.

한국에서 인상 깊었던 방문지를 꼽다 보니 역사 전공자(독일 튀빙겐대·본대학 법학 역사학 정치학 전공)답게 북한산성 남한산성 강화도 경주 등 역사 유적지를 주로 꼽았다. “고려시대 수도였던 개성도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2년 전 열흘 일정으로 북한의 개성, 남포, 평양과 판문점 등을 방문했던 기억을 독일인답게 꼼꼼하고도 정확하게 복기했다. 남북한 관계에 대해서는 “같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민족이 분단된 채 반세기 이상 대립해온 것은 매우 부자연스런 상황”이라며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우선 남과 북이 정치체제도 다르고, 북한이 매우 가난하긴 하지만 외국인의 눈에는 남과 북이 여전히 비슷한 모습을 많이 공유하고 있다는 게 자이트 대사가 받은 인상이다. 그는 “평양조차 한국에 비하면 매우 시설이 열악하지만 평양의 젊은 여자들은 서울 아가씨들처럼 주어진 조건 아래에서 매우 잘 꾸며 입고 다닌다”며 “사람들도 친절하고 매우 부지런하다”고 말했다.

북한 정치 전망에 대해 냉철한 분석도 내놨다. 그는 “북한은 지금 외부 지원이 없으면 생존이 힘든 처지”라며 “그런 상황에서 북한 주민들이 김정일·김정은의 지배를 받아온 것을 자랑스러워할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개인적으론 북한 주민들이 친(親)김정일·김정은 세력인지 매우 의심스럽다”는 민감한 표현도 썼다. 예(예스)와 아니요(노)를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라는 외교관의 입에서 북한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단정적인 전망이 나와 깜짝 놀랐다.

최근 뜨거운 이슈인 유럽 재정위기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자이트 대사는 독일이 주도하고 있는 위기 처방인 긴축정책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긴축’이란 용어 대신 ‘책임있는 재정운용’이란 표현을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당한 내핍이란 개념을 포함하는 ‘긴축’은 독일 이외 나라들이 악용하는 편향적인 용어라는 주장이다. 현재의 위기가 갑자기 등장한 단기적 위기가 아닌 만큼 장기적인 근본 처방에 집중해야 한다는 게 자이트 대사의 설명이다. 지난 10여년간 글로벌 각국이 싼 이자에 손쉽게 돈을 빌려 부동산 등에 투자한 것이 위기를 부른 만큼 돈을 찍어내 시장에 푸는 것은 절대로 해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재 유럽의 위기는 장기적 현상입니다. 각국 정부가 경제구조를 개혁하는 어려운 길을 피하고 돈을 푸는 쉬운 길을 택한 결과 위기를 맞았습니다. 국가 재정이 원칙도 없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형태로 운용된 탓입니다. 이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는 “미래의 빚만 늘리는 (경기부양) 정책을 권장해서는 안 된다”며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들은 세금을 제대로 걷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며 그것이 책임있는 재정운용의 첫발이 될 수 있다”는 뼈있는 말도 남겼다.

자이트 대사는 이어 “한국과 독일이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 이후 빠른 속도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두 나라에 강한 제조업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서비스업과 금융업에 중점을 뒀던 미국과 영국은 계속 돈을 푸는 ‘이지 머니’ 정책으로 위기를 벗어나려 하고 있지만 효과는 신통찮다”고 꼬집었다.

한스 울리히 자이트 주한 독일대사 "韓·獨이 금융위기 넘은 건 강한 제조업 때문"
‘스페인과 이탈리아가 쓰러질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자이트 대사는 “그런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탄탄한 산업 기반을 지닌 이탈리아를 마리오 몬티 총리라는 훌륭한 정치 지도자가 이끌고 있는 만큼 조만간 위기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스페인도 은행권 부실이 있지만 최악의 사태는 피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최근 유럽 대륙의 양대축인 독일과 프랑스 관계가 삐걱거리고 독일이 궁지에 몰렸다는 지적에도 자이트 대사는 여유있게 답했다. 그는 “1980~1981년 프랑스 파리 국립행정학교(ENA)에서 공부했다”며 “선거를 앞둔 정치인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약속을 하곤 한다”고 말했다.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5월 대선에서 집권한 뒤 독일 주도의 긴축정책이 올랑드의 성장정책에 주도권을 내줬지만 조만간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프랑스가 독일에 보조를 맞출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

자이트 대사는 “대선과 총선 정국에서 올랑드 대통령이 프랑스 국민들에게 ‘걱정마, 모두 잘 될 거야’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선거를 앞두고 내놓은 단기 정책에 민감할 필요는 없으며 프랑스 사람들도 여름휴가를 보내고 난 다음에는 공약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보게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어느덧 후식으로 매실차가 나왔다. 분위기 전환 겸 한국과 독일 간 협력관계에 대해 물었다. 지난해 체결한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이후 한국과 독일의 경제협력에 진전이 있는지도 궁금했다.

자이트 대사는 양국의 교역 통계를 살펴보면 한·EU FTA 체결 이후 한국의 대독일 수출이 약간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리먼 사태 이후 독일 선주들이 한국 조선사들에 대한 선박 건조 주문을 취소한 영향이 뒤늦게 나타난 탓이라는 답을 내놨다. “큰 배를 만들려면 2년이 걸린답니다. 2년 전 결정 때문에 2011년 하반기 양국 간 무역 통계가 왜곡됐습니다. FTA가 없었다면 아마도 통계는 더욱 나빴겠죠. FTA는 한국과 독일 모두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인 중 가장 친한 사람을 한 사람만 꼽아 달라고 부탁했다. 어떤 질문이 나와도 각종 데이터를 인용하며 술술 답하던 그가 처음으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한참 만에 입을 뗀 자이트 대사는 “한 사람만 고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여러 명 언급해도 된다’고 하니 김효준 BMW코리아 대표와 박동훈 폭스바겐코리아 대표 등 독일차 한국법인 최고경영자들을 꼽았다. 친한 사람을 꼽을 때도 디테일에 강하고 자신의 업무에 충실한 독일사람의 면모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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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이트 대사의 단골집 - 콩두 레스토랑
청국장 스테이크·흑마늘 등심구이…퓨전에 녹은 장맛

한스 울리히 자이트 주한 독일대사 "韓·獨이 금융위기 넘은 건 강한 제조업 때문"
서울 신문로 서울역사박물관 1층에 있는 ‘콩두 레스토랑’은 현대적 메뉴를 선보이는 퓨전 한식당이다. 한국 요리의 기본인 콩과 장(醬)을 주재료로 음식을 만든다. 각 지역 명인과 장인이 담근 장만을 엄선해 사용한다. 양조간장보다는 진한 맛의 조선간장을 주로 쓴다.

‘15년 씨간장 소스와 의성 흑마늘 퓨레를 곁들인 한우 등심구이’(3만5000원)가 대표 메뉴다. 등심을 구워 고명과 소스를 올려 낸다. 흑마늘 퓨레의 달콤한 향이 특징이다. 소스는 조선간장을 썼다. ‘백김치 처트니를 곁들인 청국장 소스의 진안 손두부 스테이크’(2만5000원)도 유명하다. 살짝 구운 손두부에 퓨전식 청국장 소스를 얹어 낸다. 청국장 고유의 냄새를 순화시키고 부드러운 질감은 살렸다.

‘고산 윤선도 반가 기법의 안흥산 꽃게장’(2만8000원)은 일반 게장과 달리 달콤하지 않고 담백하다. 안흥에서 꽃게를 공수해 조선간장에 담근 것으로 정갈한 맛이 특징이다. 코스 요리는 점심 2만7000~4만9000원, 저녁 4만5000~10만원. (02)722-7002

김동욱/고은이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