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창구에서 일하는 김 계장. 늘상 금전거래가 오가는 곳이다 보니 예민한 고객들이 많다. 김 계장과 동료들은 요주의 고객들을 급수별로 나눠 ‘JS’, 이보다 심하면 ‘HS’로 부른다. JS는 진상, HS는 화상의 약자다. 트집 잘 잡기로 악명이 높은 단골 노처녀 고객이 창구에 나타나면 직원들의 메신저에는 ‘JS 등장’이라는 경고 문구가 여기저기서 뜬다. 한번은 신입 여직원이 그 고객의 주민번호를 이면지에 급하게 받아 적다가 “내 개인 정보를 왜 이면지에 적냐”며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었다.

직장 생활을 하다보면 고객이나 구매처 등으로부터 황당한 컴플레인을 받는 일이 적지 않다. ‘고객은 왕’이라며 이해해 보려고 하지만 솔직히 마음 한구석에는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다. 김 과장, 이 대리들을 화나게 하는 컴플레인에 얽힌 애환을 살펴본다.

◆“보상 안 해주면 동영상 언론사에 뿌립니다”

식품회사 고객상담실에서 근무하는 유 대리. 여름이 가까워지고 있는 요즘은 벌레로 인한 클레임이 늘어나는 때다. 유 대리는 지난주에 ‘제품에서 벌레가 나왔다’며 클레임을 제기한 고객의 집으로 출동했다. 그가 소비자의 집 거실로 들어서는 순간, 첫 눈에 들어온 것은 삼각대에 올려져 있는 디지털 캠코더. 그 소비자는 유 대리를 소파에 앉히고는 신속하게 캠코더 녹화버튼을 눌렀다. “보상 잘 안 해주시면 이 녹화된 영상을 언론사로 뿌릴 겁니다.” 이 소비자는 이런 식으로 공포분위기를 조장해 보상을 챙기는 블랙컨슈머였다. 유 대리 또한 처음 겪는 경험이라, 카메라만 의식한 채 진상 조사도 없이 ‘잘못했다’는 말만 되풀이했으니….

K은행 분당지점에 근무하는 정 대리는 주로 주부고객들을 대한다. 소득수준이 높은 동네이기에 따지고 드는 손님이 다른 곳에 비해 적은 편이지만, 한번 ‘제대로’ 걸리면 진을 빼는 경우가 많다. 지난 겨울 정 대리의 창구에 고가 수입품으로 온몸을 치장한 중년 주부고객이 나타났다. 상담업무를 마친 정 대리는 손 세정제를 사은품으로 증정했다. 보통 고객들은 상담만 했는데도 선물을 주면 반색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 여성 고객은 “집에 치약이 떨어졌다. 치약은 없냐?”며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당황한 정 대리는 “고객님, 치약은 지금 보유하고 있지 않습니다”고 공손히 말씀드렸지만, 그 고객은 “너희들은 나의 ‘니즈’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며 화를 낸 후 손 세정제를 들고 사라졌다.

다음날 지점장에게 호출당한 정 대리의 ‘분노 게이지’는 하늘을 뚫을 지경이었다. “이봐 정 대리, 고객님이 사은품 종류 물어보신다고 그렇게 화 낼 필요까지는 없잖아. 이번달 고객만족(CS) 평가에서 각오 좀 해야겠어.”

◆타고난 걸 어떡해

최 과장은 최근 전화 응대가 불친절하다는 고객 평가를 받고 깜짝 놀랐다. 성격이 털털하고 활달한 그는 늘 친절사원으로 꼽혀왔기 때문이다. 평소와 상반된 결과는 그의 근무지 이동에서 비롯됐다. 부산에서 근무하다 결혼 후 서울로 올라온 뒤 사투리가 문제가 된 것. 불친절 평가를 받은 이후 소심해진 최 과장은 부쩍 말수가 줄었고, 금방 고쳐지지 않는 사투리 때문에 목소리도 작아졌다. 가끔 사투리를 따라하는 주변 동료들을 보면 그저 ‘궁디를 주 차 삐고 싶은’ 야속한 마음이 든다.

전자회사 AS센터실에 있는 박 대리는 목소리 하나로 입사한 여사원이다.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클레임 고객들의 전화를 일일이 응대하고, 결국 그 고객의 기분을 풀어주는 남다른 재주를 갖고 있다. 하지만 그의 천적이 나타났으니, 다름 아닌 스토커다. 처음에는 진짜 클레임 문제로 전화를 걸었던 그 남성 고객은 박 대리의 목소리에 반해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걸어왔다. 박 대리도 처음엔 웃어 넘겼지만 이제는 엄청난 스트레스가 됐다. ‘고객이 왕’이라 안 받을 수도 없는 노릇. 하지만 박 대리는 이제 그 스토커 고객과 더 이상 통화를 하지 않는다. 회사에 끈질기게 요청한 끝에 결국 부서를 옮겼다.

◆절반 이상 쓴 제품도 “바꿔줘~”

백화점 화장품 코너 윤 대리에게 가장 많이 걸려오는 전화는 ‘화장품이 안 맞으니 다른 걸로 교환해 달라’는 클레임 전화다. 대부분 거의 새 제품을 들고 교환을 요구하러 오지만 이번은 달랐다. 교환을 요구하며 가져온 제품을 보니 이미 절반 넘게 쓴 것이다. 윤 대리는 어이가 없어 “어떻게 피부에 맞지 않은 제품을 이렇게 많이 쓰셨냐”고 했더니, 그 고객왈, “피부에 맞는지 계속 테스트 하느라 이렇게 썼다”는 것이다. 윤 대리는 울며 겨자먹기로 제품을 교환해줬지만, 그날의 찜찜한 기억은 오래 가슴에 남아 있다고.

의류회사 강 과장은 올해 34세의 골드 미스. ‘얼짱’에 몸매까지 좋아 사내에서 인기 만점인 그녀는 패션감각도 뛰어나 옷 쇼핑에 빠져산다. 매주 금요일이면 회사에서 나와 클럽으로 향하는 ‘미스 강’. 역시나 클럽파티복을 항상 챙겨다닌다. 문제는 강 과장의 고약한 환불습관. 강 과장은 금요일 클럽파티를 위해 그전 주말께 드레스를 산 후, 클럽에서 한번 입고는 다음날 바로 환불을 한다. 물론 나름대로 신경 써서 깨끗이 입고, 태그를 제거하지 않은 상태로 교묘히 숨겨서 착용한 후 환불하는 전략까지 쓴다니….

◆진화하는 고객 대응 전략

김 과장, 이 대리들은 쏟아지는 고객들의 불만과 요구를 처리하면서 대처 요령도 자연스레 익힌다. 하 대리는 늘 기름값에 신경이 곤두서 있다. 운전도 하지 않는 그가 기름값에 연연하는 이유는 정유사에서 근무하기 때문이다. 하 대리는 “콜센터도 아니고 관련 부서도 아닌데 어떻게 전화번호를 알고 하는지 모르겠다”며 “오르면 오른다고 항의하고 내리면 왜 이렇게 조금 내렸냐고 타박한다”고 울상이다.

처음엔 기름값과 관련된 하소연이나 불만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어주던 그는 이젠 너무 많은 전화를 받다보니 나름대로 요령이 생겼다. ‘기름값이 왜~’로 시작하면 상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동응답기’처럼 답하는 것이다. 싱가포르 국제 제품가와 환율 등에 연동되는 기름값 결정 원리를 복잡하게 설명하려 하면 상대가 먼저 조용히 수화기를 내려 놓는다고.

식품회사 홍보팀 천 대리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저기요~ 홍보실이죠? 저희 아들이 그 회사 과자를 너무 좋아하는데요, 이렇게 좋아하는 소비자 요구 하나 들어주세요.” 처음엔 칭찬 전화인줄 알았으나, 갈수록 진지하게 다가오는 그 아주머니 목소리. 내용인 즉, 자신의 아이가 과자를 너무 좋아하기에, 자신의 아이를 그 과자 광고모델로 써달라는 억지였던 것이다. 천 대리는 그 아주머니를 설득하려 최선을 다해봤지만, 아주머니의 뜻은 굽혀질 줄 모르고. 결국 회사 사보에 그 고객의 사연과 사진을 올려 주겠다는 것을 제안해 합의를 끌어냈다고.

김일규/윤정현/강영연 기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