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새로운 보직을 맡을 때마다 너무 어려워 도망가고 싶었습니다.”

최치훈 삼성카드 사장(55·사진)은 지난 8일 전북대 삼성문화회관에서 열린 ‘열정樂서’에서 한 대학생이 ‘하던 일을 포기하고 싶었던 때는 언제였나’고 묻자 이같이 답했다. 최 사장은 “사람들은 내가 어려움 없이 승승장구했다는 편견을 갖고 있다”며 “잘되는 기업은 새로운 CEO(최고경영자)가 필요없고 은퇴를 해서 CEO 자리가 빈 거라면 내부 승진을 시킨다. 결국 나를 찾은 데는 모두 위기를 겪는 곳이었다”고 말했다.

외교관인 부친 덕분에 오랫동안 외국 생활을 한 그는 이건희 삼성 회장이 수료한 조지워싱턴대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마쳤고, 세계 최대 제조업체인 GE그룹의 사장까지 지냈을 정도로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다.

○학점 0.52

‘0.52’. 그의 대학 1학년 학점이다. 최 사장은 “즐겁게 생활하다 보니 학점이 엉망이었다”며 “나머지 3년은 고생을 많이 했다”며 웃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득이 됐다. 미국 터프츠대를 졸업하고 MBA에 입학하는 과정에서 0.52라는 학점이 도움이 된 것. “자기소개서에 0.52를 받은 것을 소상히 설명했어요. ‘어떻게 하다 0.52를 받았을까’ 궁금해하던 심사위원들은 그 학점을 극복하기 위한 제 노력과 그로 인한 성장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당시 직장 경력도 없는 학생이 바로 MBA에 입학한 건 드문 경우였습니다.”

MBA를 마치고 한국에 온 그는 공군학사장교(77기)로 3년6개월을 복무했다.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이 동기다. 흔히 ‘육개장’으로 불리는 6개월짜리 석사장교가 있었지만, 그는 입대를 하고 나서야 그런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비록 복무기간은 3년이나 더 길었지만 공군장교를 택한 것이 전역 후 GE에 들어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88년 한국 공군은 차세대 전투기 120대를 도입하는 전투기사업을 진행했다. 이 사업은 1960년대 말 20여년 동안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큰 전투기사업으로 모든 전투기 관련 업체들이 눈독을 들였다. 전투기 엔진사업을 하는 GE도 마찬가지였다. “GE는 한국 사람이면서 외국에서 공부해 영어도 되고 MBA를 가진 사람, 동시에 공군 장교로 복무한 사람을 찾았어요. 그런 사람이 몇 명이나 있었을까요. 저 하나였습니다.” 최 사장은 “하늘이 준 기회였다”고 회상했다.

○사장을 맡을 수 없는 네 가지 이유

그렇지만 그에게 주어진 기회들이 늘 반갑지만은 않았다. 그는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방한한 잭 웰치 회장 앞에서 보고할 기회가 생겼다. 3박4일을 화장실에서 살다시피했다. “자신이 없어 거울 앞에서 내내 연습을 했어요.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에 콤플렉스가 있을 정도로 싫어했거든요.” 발표는 성공적이었고 회장에게 인정받은 최 사장은 1993년 미국으로 건너가 회장실에서 일하게 된다.

한번은 웰치 회장이 최 사장을 집무실로 불렀다. 그리곤 아시아태평양항공기엔진총괄 사장을 맡으라는 깜짝 제안을 했다. 그러나 최 사장은 그 자리에서 웰치 회장의 제안을 거절했다. “제가 할 수 없는 이유 네 가지를 말했어요. 사장이 되려면 기술, 산업, 지역, 사람을 알아야 하는데 공대를 안 나와 기술을 모르고 항공기엔진 산업을 모르며 한국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아시아라는 지역을 모르고 경험이 없으니 조직원과 고객도 모른다고 했어요.”

대답을 듣고 잠시 말이 없던 웰치 회장은 “30년 동안 인터뷰했지만 다들 할 수 있다고만 하는데 안 된다는 사람은 처음 본다”며 “당신이 적임자”라고 말했다. 결국 최 사장은 홍콩으로 떠났다.

○인생의 쉼표와 마침표

위기로 보였던 일들이 훗날에는 결국 행운이 됐다. 아시아태평양총괄 사장으로 아시아 외환위기를 극복한 그에게 회사는 2003년 전 세계 영업총괄 사장직을 맡겼다. 그리고 2004년 그는 GE 본사 사장까지 올랐다. 최 사장은 학생들에게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피하지 말고 받아들이는 ‘리스크테이킹’을 잊지 말라”며 “쉬운 길로 가면 편하겠지만 어려움을 극복해낸 사람을 이길 수 없다”고 조언했다.

그는 “인생에서 실패는 마침표를 찍을 때”라며 “그렇기 때문에 아직까지 인생을 살면서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학점 0.52였을 때 포기하고 마침표를 찍었다면 실패였겠지만, 쉼표를 찍고 다시 MBA에 들어가는 노력을 하면 실패가 아니라 고난일 뿐이죠. 마침표를 찍지 않는 저에게 ‘열정’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전주=강영연 기자 yy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