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는 “《서경(書經)》의 기록을 다 믿을 바에는 차라리 《서경》이 없느니만 못하다”고 했거니와 글을 매우 신중히 쓰고 책을 함부로 내지 않았던 옛날의 글들도 다 믿을 수는 없다. 조선후기 당쟁이 격화된 뒤로는 상대편을 비방하고 자기편을 두둔하는, 일방적인 내용의 글들이 많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연보에 중요한 사실이 잘못 기록된 것을 지적하고, 붕당이 나뉘어진 뒤로 나온 기록들은 대개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의 ‘이여홍에게 보낸 편지(與李汝弘)’를 읽어보자.

‘근래 《우암연보(尤庵年譜)》를 보니 아무래도 미심쩍은 곳이 있었습니다. 효종 무술년(1658) 겨울 11월에 여강(驪江)이 9품의 말단 벼슬아치로서 우암에게 발탁돼 여덟 품계를 뛰어넘어 진선(進善)에 특별히 제수됐으니, 우암이 이조(吏曹)를 맡은 지 겨우 50여일 남짓 되던 때였습니다.’

다산은 우암이 여강을 사문난적이라고 했던 사실을 들어, 그의 발탁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런데 《연보》에서는 이보다 6년 전인 황산(黃山)의 모임에서 이미 여강을 이단(異端),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해 왕망(王莽)·조조(曹操)·동탁(董卓)·유유(劉裕) 등에 비겼다고 하니, 이럴 리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황산의 모임이 있기 12년 전에 우암이 벌써 《이기설(理氣說)》을 지어 여강을 이적금수(夷狄禽獸), 난신적자(亂臣賊子)라 했다고 했으니, 이럴 리가 있겠습니까. 참으로 그랬다면 그 사이 수십 년 동안 여강에 대한 우암의 언론은 줄곧 변함없이 여강을 난신적자라 하다가 갑자기 난신적자를 여덟 품계나 뛰어넘어 곧바로 진선(進善)에 임명하게 한 것이니, 매우 이치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이어 다산은 붕당이 나뉜 이래 기록들을 믿을 수 없다며 탄식한다.

‘종합해 말하면, 우암이 여강과 사이가 벌어진 것은 기실 기해예론(己亥禮論) 이후의 일로서 사적(事跡)이 명료하니 굳이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공정한 마음과 공정한 눈으로 보면 엊그제 일처럼 또렷이 알 수 있습니다. 편집의 어려움이 이와 같으니, 애석한 일입니다.’

글 속의 여강은 백호(白湖) 윤휴(尹·1617~1680)를 가리킨다. 백호가 남한강가인 경기도 여주에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이다. 우암과 백호의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658년에 우암이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9품의 말단 벼슬아치인 백호를 추천해 정4품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진선(進善)에 천거했는데, 이 사실을 두고 《우암연보》에서는, ‘윤휴가 주자의 《중용장구(中庸長句)》의 주(註)를 고친 뒤로 선생이 사문난적으로 배척했다. 이런 까닭에 이조판서가 돼 인사행정을 맡은 뒤로도 윤휴를 등용할 뜻이 없었다. 이에 선생을 질책하는 말이 사방에서 이르렀고 윤선거(尹宣擧)는 심지어 편지를 보내어 윤휴를 등용하지 않는다고 질책했고, 혹자는 곧바로 대사헌에 제수하지 않은 것을 잘못이라 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의 비난이 비등해 상황이 매우 위태하니, 선생이 마침내 윤휴를 진선(進善)의 말망(末望)에 올려 낙점을 받게 됐다’고 했다.

우암이 백호를 탐탁잖게 여겨 삼망(三望) 중 말망(末望)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인데, 다산은 이에 대해 명망은 높고 자급(資級)은 낮은 사람을 특별히 발탁할 때 말망에 이름을 올려서 낙점을 받는 관례가 있다고 반박했다. 일종의 인사행정에서 특별 채용의 절차이지 백호를 탐탁잖게 여겨 말망에 이름을 올린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우암연보》에 의하면, 이보다 6년 전에 우암은 시남(市南) 유계(兪棨)·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와 함께 황산서원(黃山書院)에서 유숙하면서 백호에 대해 비판했다는 것이다. 그 기록에서 중요한 부분만 발췌해 보자.

우암이 ‘하늘이 공자를 이어 주자를 세상에 낸 것은 실로 만세의 도통(道統)을 위해서다. 주자 이후로 하나의 이치도 드러나지 않음이 없고 하나의 글도 밝혀지지 않음이 없거늘 윤휴가 스스로 자기 견해를 세워 마음대로 자기 주장을 내세운다.’ 하니, 미촌이 “의리는 천하의 공물(公物)인데 지금 희중(希仲·윤휴의 자)으로 하여금 감히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했다.

이에 우암이 ‘윤휴처럼 참람된 놈을 고명하다고 한다면, 왕망(王莽)·동탁(董卓)·조조(曹操)·유유(劉裕) 같은 역적들도 모두 너무 고명해 그런 것인가. 윤휴는 실로 사문난적이니, 무릇 혈기(血氣) 있는 사람들이면 모두 죄를 성토해야 한다’ 하니, 미촌은 ‘그대는 희중을 너무 두려워한다’ 했다.

이 같이 《우암연보》에는 황산서원에서의 대화를 매우 사실적으로 기록해 놓았지만 다산은 앞뒤 사실이 서로 맞지 않다고 여겼다. 다산은 우암과 백호의 사이가 벌어진 것은 황산서원의 모임이 있은 지 7년 뒤인 1659년 기해예론(己亥禮論) 때 서로 의견이 엇갈린 뒤부터라고 단정했다. 그 이전에는 두 사람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지만 우암이 사문난적으로 몰았던 백호와 사이가 좋았다고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암의 사후에 《연보》를 쓰면서 사실을 날조했다는 것이다.

당쟁이 사라진 지 오래지만 그 여파는 지금도 남아 있다. 아직도 지연과 혈연에 따라 퇴계니 율곡이니 존모하는 선현(先賢)이 나뉘고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도 포폄이 달라진다. 딴은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와 굳어진 생각일 터이니, 어디 쉽게 바뀔 수 있겠는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조선시대 당쟁의 기억은 머지않아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어지겠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오히려 지역과 이념의 대립이 또 다른 격한 싸움판을 만들고 있다.

사람의 생각도 에너지라 그 보이지 않는 파장이 쉽게 그치지 않고 역사의 굴곡을 따라 흐르는가보다.

이상하 < 고전번역교육원 교수 >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www.itkc.or.kr)의 ‘고전포럼-고전의 향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