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화이트데이' 챙겨주는 훈남 김이사, 알고보니 법인카드로 온갖 생색은…
‘올해는 딸기 퐁듀 초콜릿이라는데’ ‘어느 부서까지 돌렸대?’ ‘너도 준비했니?’

지난 2월14일 밸런타인데이 때의 어느 사무실 풍경. 영업팀 김 대리의 메신저가 아침부터 바쁘다. 밸런타인데이 때마다 수제 초콜릿을 만들어 오는 한 동기 때문에 다른 동기들과 대책회의를 하느라 메신저에 불꽃이 튄다. ‘계집애, 정말 짜증나게 하네. 어제까지만 해도 올해는 시간 없어서 초콜릿 못 만들 것 같다더니. 결국 막판에 또 배신이네.’ 매년 동기들끼리 “올해부터는 초콜릿을 선물하지 말자”며 카르텔을 맺지만, 매번 어기는 그 한 사람이 정말 얄밉다. 다른 동기들과 올해도 “당했다”며 점심시간 초콜릿을 사러가기로 했지만, 이미 ‘게임’은 반쯤 끝났다. 아침부터 수제 초콜릿을 선물 받은 남자 부서원들은 그 동기에게만 미소를 짓는다. “막내들도 한두 해쯤 초콜릿 선물하면 그만인데, 6년째 동기 하나 때문에 모두가 억지춘향격으로 초콜릿을 사고 있네요. 회사에 선물을 못하게 하는 규정이라도 생겼으면 좋겠어요.”

연인들 간에 사랑을 확인하는 각종 ‘데이’들이 사무실까지 침투하고 있다. 밸런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블랙데이, 빼빼로데이 등등. 건조한 사무실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윤활유 역할도 하지만, 모든 선물에는 항상 ‘눈치’와 ‘부담’이 뒤따른다. 14일 화이트데이를 앞두고 각종 데이에 얽힌 김 과장 이 대리들의 에피소드를 정리해 본다.

○“무슨 ‘데이’가 이렇게 많아”

지난해 ‘여초(女超)’ 회사에 입사한 신입사원 신씨는 ‘데이’가 오는 것이 곤혹스럽다. 기념일을 챙기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 여자친구에게 늘 구박을 받았는데, 회사에서는 핀잔주는 사람이 몇 배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발단은 지난해 화이트데이였다. 별생각 없이 회사에 갔던 것이 실수였다. ‘센스가 없다’는 말부터 ‘회사에 대한 애정이 없다’ ‘선배에 대한 존경심이 없다’는 등 하루종일 시달렸다. 신씨는 다음날 늦어서 죄송하다는 내용의 귀여운 카드와 함께 정성스럽게 포장된 사탕을 하나씩 돌렸다. 그리고 ‘이제 일년은 편하겠지’라고 한숨을 돌렸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빼빼로데이를 아무 준비 없이 맞았다 또 한바탕 설움을 당한 것. ‘한번 가르쳐줘도 배우는 게 없다’ ‘모르면 옆을 보고 따라해라’ 등 귀에 못이 박히게 잔소리를 들었다. 그는 “빼빼로 데이는 여자친구와도 챙기지 않았다”며 “무슨 놈의 데이가 이렇게 많은지 정말 피곤하다”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날’이 오면 잠시 회사를 떠나있고 싶은 직원들도 많다. 지난 밸런타인데이에 출장을 가게 된 정 대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신입사원이 들어오지 않아 몇 년째 부서 막내인 그는 밸런타인데이가 어떤 업무보다 신경이 쓰였다. 너무 좋은 초콜릿을 준비하면 옆 부서 여직원들의 눈치가 보이고, 그렇다고 성의없이 준비하면 부장의 특기인 웃으며 화내기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동료들도 출장가는 것을 부러워하는 눈치예요. 기내에서 초콜릿이나 하나 사 올까 해요.”

○얌체족은 언제 어디서나…

“자기 회비 냈어? 오늘 사야 내일 줄 수 있으니까 가기 전에 주고 가.” 김 대리는 밸런타인데이 회비를 내라는 이 과장이 얄밉다. 이 과장은 밸런타인데이나 빼빼로데이 때마다 부하 여직원들에게 회비를 거둬 남자 직원들에게 선물을 돌린다. 여직원이 얼마 없던 해엔 한 사람당 5만원 이상 갹출해 선물을 구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선물에 대한 생색은 이 과장이 독차지했다. 그는 “백화점 가서 제일 좋은 걸로 고른거예요”라며 하나씩 선물을 돌렸다. “저희도 돈 냈어요”라고 말하기가 민망해 그냥 넘어가던 김 대리는 올해 ‘불편한’ 진실을 알게 됐다. 그동안 이 과장은 회비를 내지 않아왔던 것. “어머 자기, 나는 시간 들여 백화점 가서 선물도 골라야 하고 또 일일이 돌리느라 고생하잖아”라며 뻔뻔스럽게 대응하는 이 과장을 보며 김 대리는 내년부턴 절대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지난해 화이트데이 때 강 이사는 남자 막내직원을 방으로 불렀다. “윤 주임, 우리 부문 여직원들 주게 예쁘게 포장된 사탕 3 세트만 사올래?” ‘부문 여직원 숫자가 다섯인데 왜 세 개만 사오라는 거지’라는 궁금증이 생겼지만, 윤 주임은 지시한 숫자만큼의 선물꾸러미를 사들고 회사로 돌아왔다. 사무실로 오르는 엘리베이터에서 강 이사가 이전에 근무하던 부서의 여직원과 마주치면서 의문이 풀렸다. “어머, 이번에도 딱 그 숫자만큼 시키셨나보네. 매번 자기한테 밸런타인데이 때 초콜릿을 상납한 여직원들에게만 사탕을 돌리거든요.” 윤 주임의 궁금증이 해소되기가 무섭게 그 여자 직원은 ‘충격적’인 말을 남기고 엘리베이트에서 내렸다. “에휴, 개인적으로 받은 거면 자기도 쌈짓돈 좀 쓰지. 전표 한번 봐요. 그것 봐, 이번에도 법인카드잖아. 그거 자기네 부서 운영비에서 정산해야 돼.”

○데이트를 해도 안 해도 고민

최근 여자친구가 생긴 오 주임은 김 부장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데이트도 못한다. 올해 50줄에 접어든 김 부장. 그는 아직도 결혼을 못한 노총각이다. 평상시에는 차분한 성격에 웃음도 많지만, 남들이 연애하는 것에는 상당한 질투를 느낀다. 일종의 자격지심이다. 그런 김 부장이 가장 싫어하는 날들 중 하나가 바로 각종 데이다. 팀원들이나 주변 연인들의 ‘닭살 행각’을 보면 은근히 화를 내고 만다. 지난달 14일에도 그랬다. 밸런타인데이를 맞아 오 주임이 6시 칼퇴근을 위해 짐을 싸고 있었다. 물론 여자친구와 데이트 약속이 잡혀 있다. 이를 모를 리 없는 김 부장은 아니나 다를까 또 심술이 발동했다. “어이 오 주임, 급히 만들 자료가 있는데 이것 좀 도와줄래?” 오 주임은 결국 여자친구와의 약속시간을 1시간이나 넘겨버렸다. “부장님~, 히스테리 싫어요~. 올해는 꼭 좋은 분께 초콜릿 받으시기 바라요~.”

작년 밸런타인데이 때, 별명이 ‘모태 솔로’인 강 대리는 마우스 옆에 메모지를 두고 바를 정(正)자로 ‘데이트 안해?’라는 말을 몇 번 들었는지 세어 보았다. 정확히 35번이었다. ‘왜 이렇게 남의 인생에 관심이 많은지…. 자기들 일이나 신경 쓰지….’ “명절에 고향에 내려가 결혼 안 하냔 소리를 듣는 것보다 밸런타인데이에 ‘데이트 안 하냐’는 질문이 더 큰 스트레스입니다. 내년부턴 데이트가 없어도 있다고 해야겠어요.”

강영연/윤성민 기자 yy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