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보톡스, 그 우연과 필연
서구일 < 모델로피부과 대표원장 doctorseo@hotmail.com >
대학 시절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궤변 같기도 하지만 진화론을 주장하는 훌륭한 논리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보니 우연과 필연의 논리가 인생살이에도 비슷하게 적용된다고 생각하게 됐다. 1998년 필자가 서울대병원 피부과 임상강사로 근무하던 시절, 손에서 땀이 많이 나는 국소다한증 환자에게 보툴리눔 독소를 손에 주사하면 땀이 나지 않는 효과가 5~6개월 지속된다는 논문을 우연히 접하고 눈이 번쩍 떠졌다.
손 다한증 환자의 땀분비량을 측정하는 게 필자의 레지던트 1년차 임무였는데 땀량을 재는 정밀저울이 12층에 있어 갔다 오는 데 30분이나 걸렸다. 하지만 피부과 의국 모 선배님의 논문 욕심 때문에 레지던트나 환자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검사를 강행해야 했다. 그 아픈(?) 기억이 생생한 덕분인지 보톡스를 한 번만 주사해도 수개월간 땀 분비가 현저하게 줄어드는 새로운 다한증 치료법을 발견한 것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약값 역시 보톡스 한 병에 4만원(1996년 서울대병원 약전)으로 ‘착한’ 편이었다.
문헌조사를 해봐도 초기 단계의 논문 몇 편밖에 없는 상황이라 ‘내가 앞으로 갈 길은 이거야’라는 생각으로 3일 만에 연구계획서를 완성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서울대병원 약전에 4만원으로 적혀 있던 보톡스 약값은 실제 40만원으로 ‘0’이 하나 빠져 있었던 것이다. 양손에 두 병이면 약값만 80만원으로 5~6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효과를 보고자 과연 환자들이 나설까. 비용 대비 효과 측면에서 심각한 고민을 하다가 간단히 주사로 하는 새로운 치료법이란 점을 부각시켜 밀어붙였고 이는 필자가 오늘날 열심히 보톡스를 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만약 내가 레지던트 때 다한증 환자의 땀량을 측정하느라 생고생하지 않았다면, 우연히 다한증 치료 논문을 읽지 않았다면, 그리고 보톡스 한 병에 4만원이란 오기가 없었다면 내가 과연 지금 보톡스 임상에서 앞서나갈 수 있었을까. 어제의 우연들이 모여서 오늘을 살고 내일의 필연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다만 수십억년이 걸린 진화론과 차이가 있다면 인생은 짧기 때문에 그 우연들을 필연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이다. 우연히 소개받은 많은 사람 중에서 지금의 파트너를 선택하게 된 필연 속에는 반드시 우리의 열정과 노력이 숨어있을 것이다.
서구일 < 모델로피부과 대표원장 doctorseo@hotmail.com >
-
기사 스크랩
-
공유
-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