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유권자여! 사탕발림 공약 가려내라
사람들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선택의 폭을 확대함으로써 당사자에게 이익이 된다는 설득을 통해 협력을 얻어내는 것이다. “내가 너에게 이것을 해 줄테니 너는 나에게 저것을 해 달라”는 식이다. 자발적 교환을 바탕으로 하는 시장에서 이뤄지는 방법이다. 자발적 거래가 많아질수록 당사자들의 이익은 커진다.

다른 하나는 선택의 폭을 제한하겠다고 협박함으로써 강제로 협력을 얻어내는 방법이다. “네가 나에게 이것을 해주지 않으면 너는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없게 되는 아주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라는 식이다. 이렇게 강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주체는 정부밖에 없다. 그래서 정부의 속성은 강제다. 세금을 내지 않거나 입영을 기피한 사람의 사회 활동이 대폭 제한되는 것이 그런 예다. 그리고 이런 강제가 더해질수록 개인의 이익은 감소한다. 또한 개인과 정부 간의 마찰이 심해지고 분쟁이 자주 발생한다.

물론 어떤 협력이 자발적인 것인지 아니면 강제에 의한 것인지에 대한 이견은 있을 수 있다. 또 정부에 의한 강제는 흔히 공공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행해지고 실제로 그런 경우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반대의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금년 총선과 대선을 앞둔 각 정당들의 공약이 가시화되고 있다. 공약을 보면 어느 정당이 집권하든 복지 확대와 재벌 개혁은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복지 정책은 민간 복지를 활성화해 키우는 것이 아니라 세금을 더 거두는 방향이고, 재벌 개혁은 경제력 집중 억제를 위해 업종과 투자, 그리고 근로시간을 제한하는 등 생산재의 사용을 규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복지를 위한 과도한 증세는 강제의 강도를 더해 개인의 사유재산을 침해하는 것이고, 생산재의 사용 제한은 생산 활동에 대한 강제가 더해지는 것이다. 강제의 강화를 통한 사유재산 침해라는 점에서 둘은 같다.

사유재산에 대한 침해의 정도가 심해질수록 개인의 자유는 더욱 축소되고 구성원들의 협동을 방해해 사회를 예종(隸從)과 불의, 그리고 분쟁의 도가니로 몰고 간다. 예를 들어 모든 언론 매체가 국가 소유라면 언론의 자유는 있을 수 없으며, 사유재산에 의해 이웃 간에 잘 쳐진 울타리가 무너지면 정의와 평화가 깃들 수 없다. 선거 이후 보편적 복지 확대와 재벌 개혁이 가시화된다면 한국은 분명히 예종과 불의, 그리고 분쟁과 갈등이 가득한 사회로 전락할 것이다. 한 나라의 정치인으로서 아직 이마저도 깨닫지 못했다면 심각한 지적 장애를 가진 사람이요, 알고도 표를 얻기 위해 기만한다면 정말로 나쁜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거대 사회에서는 흔히 소수의 강성 목소리가 각종 이슈를 선점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목소리에 편승해 “강이 없는데도 다리를 놓아 주겠다”는 식의 공약이 남발된다. 구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후르시초프가 꼬집은 것이다. 여야 할 것 없이 요즈음 정치권에서 쏟아지는 정책들이 그렇다.

지금은 이런 경향을 방치해서는 안 되는 시점이다. 강제가 도(度)를 넘어서면 협력은커녕 시스템 자체가 붕괴되기 때문이다. 씨족사회와 부족사회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원시 감정을 자극하는 잘못된 소수의 목소리를 경계해야 한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따뜻한 시장’ ‘자본주의 4.0’ 등의 용어에 현혹돼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자본주의와 시장은 유일하게 그 자체가 인간적이고 따뜻한 것이다. 강제가 전부인 요즈음의 북한은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썰렁한가.

인구 5000만명의 거대한 한국 사회가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루어 높은 생활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원리를 이해하고 각 정당이 주장하는 공약의 허와 실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말 없는 다수의 유권자들이 목소리를 크게 내야 한다. 사탕발림식 공약에 현혹된 결과의 대가는 바로 불특정 다수에 속한 국민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대한민국을 온전히 보존하고 갈등의 정치를 청산하는 길이다. 후세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는 길이기도 하다.

김영용 < 전남대 경제학 교수 yykim@chonnam.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