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대 걸쳐 음악가 배출…바흐家 '가족음악모임'
‘음악가’의 개념과 동의어로 통한 가문이 있었는데 고전주의 음악의 아버지 바흐 가문이다. 17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중반의 200여년에 걸쳐 50여명의 음악가를 배출한 데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1685~1750)를 낳았기 때문이다.

바흐의 음악 계보는 고조할아버지에서 시작해 그의 손자에 이르기까지 7대에 걸쳐 이어졌다. 특히 ‘아버지 3형제’와 함께 바흐의 ‘아들 3형제’가 유명한 음악가로 회자된다. 바흐는 고전주의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데, 그의 아들 3형제가 고전주의를 정착시켰다.

바흐 가문을 연 파이트 바흐(1619년 사망)는 빵집을 운영하던 악기 애호가였다. 모든 위대함의 시작이 그렇듯이 바흐가(家)도 한미한 상태에서 출발했던 것이다.

바흐 가문이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음악 가문으로 꽃을 피울 수 있었던 비결로 음악적인 집안 분위기를 먼저 꼽는다. 바흐는 궁정음악가였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의회와 궁정이라는 공적인 음악의 장을 접할 수 있었다. 아버지 밑에서 악보를 옮기고 금관악기들을 닦거나 현을 조이는 일을 도우면서 음악을 배웠다.

두 번째로 바흐를 키운 것은 선조에 대한 자긍심이다. 바흐는 음악가의 삶을 일군 선조들에게 긍지를 품고 전 생애에 걸쳐 그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연주를 계속했다. 이론보다 선조나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음악가로서의 재능을 확장해 나간 것이다. 이 점이 바흐가 모든 학문적인 음악이론들을 중시하지 않게 된 이유라고 한다.

바흐는 가정에서 음악적 기초교육을 통해 어린 시절부터 예술에 대한 나름의 근본 규칙을 습득했고 남들에게는 신기하거나 새롭게 여겨지는 많은 이론들을 하찮게 느꼈다. 즉 자신의 첫 번째 스승이 되어준 선조들을 연구하면서 그들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바흐의 또 다른 스승은 거장 음악가들이었다. 거리와 교통수단, 시간이 허락하는 한 바흐는 동시대 유명 음악가들의 음악을 들으러 찾아다녔다. 나이가 많든 적든 상관하지 않았다. 거장들을 관찰하면서 공부했고 그들의 작품을 모방했다.

바흐는 평생 독일을 떠나본 적이 없었는데도 국경 너머의 이탈리아와 프랑스 예술에 정통했다. 동시대 프랑스 오르간 작곡가들의 작품을 구해다 열심히 공부하고 연주했다. 이론 공부보다 거장을 찾아다니며 섭렵하고 모방하면서 이들을 뛰어넘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바흐를 키운 것은 해마다 열린 ‘가족음악모임’이었다. 바흐 가족은 해마다 아른슈타트나 아이네나흐에서 음악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은 찬송가로 시작해 즉흥적이고 다양한 목소리로 하모니를 이루어가며 민요를 불렀다. 바흐는 학교를 결석하면서까지 가족모임에 참석했다.

그는 가족모임에서 자신의 역할 모델을 찾았는데 바로 ‘아버지 3형제’ 중 작곡으로 유명한 요한 크리스토퍼였다. 바흐는 언어로 표현하고 아름다운 생각을 고안하는 데 재능이 있었던 크리스토퍼를 ‘참된 작곡가’로 부르며 자신의 롤모델로 삼았던 것이다.

훌륭한 업적을 쌓은 부모일지라도 그의 업적과 재능을 자녀에게 모두 물려주거나 승계할 수는 없다. 노하우를 전수해줄 수는 있겠지만 업적을 성취하는 것은 오로지 당사자의 몫이다. 그런 점에서 7대에 걸친 바흐가의 음악적 재능 발현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효찬 < 연세대 연구원·자녀경영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