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영화에서 길을 묻다
몇 주 전 케이블방송 채널에서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라는 영화를 보았다. 영화 개봉 당시에는 은행원 신분으로 회사 일에 모든 것을 쏟을 때여서 보지 못하다 쉰을 넘긴 나이가 돼서야 보게 된 것이다. 영화 중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결정적인 장면이 있었다. 어느 고등학교 점심 시간의 풍경, 교실 뒤편 친구들을 한 곳에 모아 놓은 한 명의 학생. 그는 마치 백과사전을 읊듯이 10분 동안 946명의 할리우드 배우들을 써내려 가며, 예술과 미학의 얘기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래, 우리 때도 딱 저런 친구들이 있었어. 이윽고 영화 속 고등학생들은 할리우드로 가자는 결의로 화물기차에 몸을 싣는다. 차창 밖으로 날리는 머릿결, 무엇에서 해방된 듯한 그들만의 웃음, 삼십 몇 년 전 내 모습이 그들에게 투영되며 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30여년 전 열정의 성장통이 아련히 밀려왔다.

1969년에 제작된 조지 로이 힐 감독의 ‘내일을 향해 쏴라’에는 나의 성장기 감성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극장 구석진 자리, 교복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대면한 부치와 선댄스의 의리는 나를 스크린의 황홀경으로 인도했다. 끝없이 펼쳐진 미국 대륙을 가로지르는 철도와 기차, 그 속 가득 담긴 광활한 풍경은 서울의 시각에만 갇혀 있던 고등학생에게 놀랄 만한 충격이었다. 극 중 폴 뉴먼의 꼼꼼함과 치밀함, 로버트 레드퍼드의 통 큰 배포와 직관력, 그 모두는 내가 앞으로 닮아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외면상 그들은 희망도 없는 갱스터로 보일 수도 있지만, 나에게 더 큰 시각으로 바라보고 더 넓은 관점으로 사고하라는 동기를 던져 주었다. 영화 속 그 유명한 자전거 신에서 울려나오는 노래 ‘Rain drops keep falling on my head’는 극장 안 소년 가슴의 쿵쾅거림을 떠올려주는 소중한 매개체다.

요사이 학교가 시끄럽다. 시각을 조금 달리해 아날로그 감성이 지배하던 시기 학교를 떠올려보자. 그 시절 아이들에겐 어른이 되는 길에 영화가 있고 음악이 있고 책이 있었다. 모여 앉아 미학을 얘기하고 낭만을 곱씹어볼 수 있었다. 그 속엔 왕따도 없고 이유 모를 폭력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우리 아이들은 운동장보다 모니터를 편히 대하고 책과 음악보다 PC게임에 자신의 감성을 쏟아붓고 있지 않은가. 또 어른들은 아이들을 디지털의 프레임에 몰아넣고 타성의 경쟁과 다툼을 방조하고 있지 않은가.

하루쯤 시간을 내어 우리 아이들과 아름다운 영화 한편을 보자. 두 시간여 러닝타임에 몸을 담그고 아름다운 장면과 싱그러운 대사와 귀에 감기는 음악을 이야기하자. TV 예능 프로그램이 쏟아내는 오락과 소비의 가치를 잠시 내려놓고 긴 호흡으로 줄기를 이야기하자. 그 과정 속에서 뿌듯한 이야기가 시작될지도 모른다. 한번쯤 영화에 길을 물어 보자.

문창기 < 이디야커피 대표 ceo@ediy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