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중국문명 설계한 한무제는 탁월한 조세행정가였다
황제가 즉위한 후 상인들을 재산세 징수의 주요 타깃으로 삼기 시작했다. 고리대금업자나 도매상들에게는 매출 자진신고를 통해 6%의 세율을 매겼고, 수공업자들에게는 상인의 절반인 3%의 세율을 적용했다. 재산을 은닉하거나 신고내용이 정확하지 않을 경우 1년간 변방에 군역을 보내고 재산을 몰수했다. 이에 상인 부호들이 반발하고 탈세를 일삼자 황제는 고민령, 즉 ‘탈루·체납 세금 회수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21세기 조세행정이라 해도 곧이 들릴 만한 이 이야기는 2000년도 더 된 한무제 때의 기록이다. 밑천을 적게 들이고 이윤을 얻는 상행위에 대해선 높은 세금을 매기고, 영세한 중소상인에게는 기업활동의 여지를 좀 더 열어주는 세밀함까지 갖추고 있다.

기원전 221년 황제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이후 2137년간 495명의 황제 중 가히 최고라고 꼽는 두 인물이 진시황과 한무제다. 《한무제 평전》의 역자는 “무제는 우리나라의 입장에선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한 침입자이기도 하지만 16세에 즉위해 70세에 서거할 때까지 54년간 하나의 통일된 제국을 다스리면서 한족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 인물”이라며 결코 진시황에 비견됨을 마다하지 않는다.

무제의 치세는 기록만 살펴봐도 화려하기 그지 없다. 최초로 연호를 사용했고 태초력을 반포해 지금까지 이어지는 정월 세수를 확립했으며, 유가를 국가 이데올로기로 삼으면서도 백가의 학문을 겸용해 수많은 인재를 양성했다.

시험제도를 만들어 태학 졸업생들을 관리로 임용하기 시작했고, 덕치를 바탕으로 엄격한 형법을 제정했다. 기전체의 사서, 즉 사마천의 사기와 서역으로 통하는 무역로인 실크로드도 만들었다. 국가 독점의 화폐 주조 시스템 기틀도 마련했다.

태학의 학생들은 연말에 엄격한 시험을 치러 그 성적에 따라 황제의 신변을 살피는 낭관이 되거나 군국의 속리로 파견됐다. 하지만 성적이 나쁜 학생들은 곧바로 퇴출됐다. 이렇게 시작된 태학 출신 관리는 무제 이후 100여명에서 원제 때에는 1000여명, 동한 말기에는 3만명으로 증가했고 이후 2000년 이상 지속된 중국 관리양성 집단의 모태가 됐다.

그런가 하면 흉노와의 오랜 전쟁으로 비롯된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단행한 여섯 차례의 화폐개혁은 국가가 화폐주조권을 독점함으로써 사수전(위조화폐)으로 인한 문제점을 말끔히 해결하기도 했다.

법치를 내세우고 친인척 비리를 용납하지 않았다. 무제의 조카 소평군의 죄를 판결해달라는 대신들의 주청에 무제는 “법령이란 선제께서 만드신 것이다. 동생 때문에 이를 어긴다면 내가 무슨 면목으로 고조의 사당에 들겠는가. 또한 아래로 만백성을 대할 수 없으리라”며 사형에 처했다는 기록은 섬뜩한 느낌이 든다.

한무제의 출생부터 즉위 후 실적과 실책을 복기하듯 살피다 보면 그의 삶과 시대상이 한눈에 보인다. 800페이지가 넘는 분량도 그리 부담스럽지는 않다.

백승현 기자 arg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