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이 발효만 남겨 두고 있는 한·미FTA협정을 또 재협상하자면서 이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협정을 폐기시키겠다는 서한을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상·하원 의장 앞으로 보냈다. 4월 총선과 12월 대선에서 이겨 집권하면 협정 파기 절차를 밟아 무효화하겠다는 것이다. 협정이 곧 발효될 예정인 시점에서 황당한 요구를 제기하고 나선 의도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반미 정서를 자극하는 것은 종종 야권을 결집하고 지지층을 결속시키는 전략의 하나였다. 야권 지도부는 국제적 흐름이나 신뢰,그리고 국익 같은 것은 일단 제쳐놓고 반미 정서를 극대화하는 배타적 전략으로 총선과 대선을 치르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정치권은 가히 파괴본능으로 질주하는 형국이다. 표를 얻고 보자는 표퓰리즘적 경쟁이 확산되면서 집단광기만 번뜩이는 상황이다. 산업화 60년의 성과와 전략은 모조리 타도 대상이 돼버린 것 같은 상황이다. 반시장 사회주의적 열풍 속에서 수출 주도와 대기업 선행전략, 세계화 개방체제가 모조리 부정되는 자기파괴적 충동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논리가 이미 70년대에 폐기처분된 낡은 사고 방식에 불과하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한·미FTA 반대론만 해도 그렇다. 이는 스스로에 대한 철저한 부정이다. 야권이 재협상하자는 10개 조항 가운데 투자자·국가 소송제도(ISD)를 포함한 9개가 노무현 정부 때 만들어졌다. 당시 국무총리를 지냈던 한명숙 민주당 대표, 장관이었던 정동영 상임고문, 집권당이던 열린우리당 FTA평가위원장을 맡았던 김진표 원내대표가 모두 동의했던 그대로다. 그런데 지금 와서는 한목소리로 폐기를 주장한다. 협정이 발효되면 미국 투기자본이 한국을 점령하고, 의료보험은 무너지며, ISD 조항에 걸려 국내법은 초토화되고 말 것이란 반세계화, 아니 반근대화 괴담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냈던 김병준 교수가 최근 출간된 책(99%를 위한 대통령은 없다)에서 “FTA 반대는 아니다”라고 절규한 것은 아마도 그가 지금 정치권 밖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라는 탁류 속에 들어가면 모두가 미쳐버리는 상황이다.

기업 정책은 더 심하다. 새누리당이나 민주당이나 다를 게 없다. DJ정부 시절인 1998년과 MB정부 때인 2007년 폐지됐던 출자총액제도가 다시 부활할 태세이고, 순환출자를 다시 규제하고 중소기업 보호업종을 되살리며 대기업이 납품 가격에 개입하자는 데에도 여야 간 이견이 없다. 한국 경제를 성장시켜 왔던 바로 그 성공모델을 깨부수고 기업가 정신을 무너뜨리겠다는 실로 시대착오적이며 유치원생 같은 주장들이다.

모두가 가치와 이념을 내팽개치면서 벌어지는 일들이요 좌익 경제학이 지난 수십년간 떠들어왔던 거짓 경제학의 논리들이다. 통합이라는 이름 아래 극좌 정치세력들의 주장까지 모두 수용하려들다 보니 파괴적 광기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새누리당은 성장 없는 분배를 강조하고, 민주당은 DJ와 노무현 정신조차 파괴하고 있으니 이런 자기부정도 없다. 한국 민주주의가 중대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