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구 식품공업협회 회장 "주6일 운동…축구는 '경영 엔도르핀' 솟게 하는 힘"
“점심 때는 바쁘면 패스트푸드로 때우기도 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즐겁게 나누고 싶은 분들과 저녁에 만나면 여기로 옵니다. 남도 음식에 워낙 젖어 있어서요.”

소비자에게 ‘맛’을 파는 식품회사의 최고경영자(CEO)가 즐겨 찾는 맛집은 어딜까. 식품업계를 대표하는 단체인 한국식품공업협회의 박인구 회장(65·동원그룹 부회장)을 만난 곳은 서울 역삼동 ‘가족회관’이었다. 지하철 2호선 선릉역 대로변에서 두 블록 들어가 주택가로 접어드는 골목 오른쪽에 살짝 숨어 있는 단독주택을 개조한 전라도식 한식당이다.

주요 뉴스에 관심이 많고 신문도 매일 꼼꼼히 읽는다는 박 회장은 ‘한경과 맛있는 만남’에 소개된 식당도 메모해뒀다 찾아가 본다고 했다. 지난해 10월18일자에 실린 기타리스트 이병우 씨의 맛집(‘트라토리아 모로’)에 갔을 땐 때마침 식사하러 온 이씨를 만났다고 했다.

●지금도 주 6일 조기축구 뜁니다

밑반찬이 차려지고 사진기자가 셔터를 누르는 동안 맛집을 소재로 이런저런 가벼운 대화가 이어졌다. 상공부(현 지식경제부) 공무원 시절인 1990년대 유럽 여행 때 ‘미슐랭 가이드’를 들고 맛집을 찾아다녔다는 박 회장에게 “미슐랭 가이드 식으로 점수를 매기자면 가족회관은 별이 몇 개냐”고 물었다. 상을 차리던 주인이 웃으며 “말씀 잘 해주세요”라고 압박(?)한다. 단골의 대답은. “3개(최고 등급) 줘야죠, 하하. 맛 외에도 청결, 접근성 등이 다 좋습니다.”

박 회장은 고등학교 정치경제 교사에서 행정고시 출신 엘리트 공직자로, 이어 CEO로 변신한 다채로운 이력의 소유자다. 2009년부터 식품공업협회 회장을 맡아 업계 내부와 정부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세 살, 한 살짜리 손녀를 둔 할아버지이지만 박 회장은 지금도 아침 회의가 있는 월요일만 빼고 주 6일 조기축구를 하는 축구 마니아다. 소속은 ‘양재축구회’. 주 포지션은 라이트 윙. “초등학교 때부터 공을 찼는데요. 땀을 흘리면 엔도르핀이 솟고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어요.” 우연찮게 생년월일(1946년 11월8일)도 히딩크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명예감독과 똑같다.

동원그룹 축구대회가 열리면 그는 최소 3~4게임은 풀타임으로 뛴다고 했다. 예선에서 동원엔터프라이즈 부회장 자격으로 한 번, 동원F&B 부회장 자격으로 또 한 번. 예선을 통과해 16강, 8강에 오르면 탈락할 때까지 계속 주전선수다. “제 허벅지를 만져보면 단단해요(차마 만져볼 수는 없었다). 하체가 얇아지는 데서 ‘늙음’을 알 수 있거든요. 그래서 꾸준히 하체 근력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폭탄주 안 마셔…사회주의 문화 같아

삼합, 산낙지, 전복, 개불, 멍게, 게장, 매생이국, 전, 갈비찜, 계란찜…. 푸짐한 남도 식탁이 한 상 차려졌다. 반주(飯酒)로는 박 회장이 가져온 칠레산 레드 와인 ‘코노수르(Cono Sur)’가 올랐다. “저는 폭탄주를 잘 안 해요. 우리의 평등주의 성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게 골프할 때 ‘뽑기’ 하고 폭탄주 아니겠어요?”

120여개 식품업체가 회원사로 가입한 한국식품공업협회는 다음달 5일 한국식품산업협회로 이름을 바꾼다(단체명을 정한 법 개정안이 최근 국회를 통과했다). ‘공업’과 ‘산업’, 비슷하게 들리지만 지금까지 산업이라는 표현을 안 썼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식품은 GDP(국내총생산)의 4%, 제조업의 18%, 고용의 6%를 차지하지만 하나의 산업으로 인정받은 것은 불과 몇 년 되지 않습니다. ‘끼니나 때우는 업’이라 생각했지, 식품업을 진흥하기 위한 조직도 법도 없었어요. 이명박 정부 와서 농림수산식품부가 생기면서 육성 개념이 도입된 것은 좋은 일이죠.”

정부는 2010년 초만 해도 ‘네슬레 같은 회사 다섯 개를 만들겠다’며 식품산업 육성에 의욕을 보였지만 최근 식품업계 상황은 그리 밝지 않다. 식품업계를 짓누르고 있는 가격 인상 문제에 대해 회원사들은 협회에 어떤 하소연을 하는지 궁금했다.

“식품 가공은 원료, 물류, 가공, 유통에 이르는 ‘서플라이 체인’상의 한 과정입니다. 식품업체들의 애로를 들어보면 ‘가공을 하는 우리만이 아니라 전후 단계를 감안해 달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물가 안정을 위한 정부 노력을 우리도 잘 알고, 협조하고 있어요. 하지만 제품 생산을 수입 원재료에 많이 의존하는 한국의 상황에서 식품 제조업체의 가격만 탓해서 되겠느냐 하는 것이죠. 상공부에서 일을 해서인지 저는 제조업에 대한 신념이 확고해요. 제조업 비중이 20% 이하면 나라 경제가 지속될 수 없습니다.”

●대기업-중소기업 이분법 버리자

상공부 고위 공무원과 식품업체 CEO를 모두 경험한 박 회장에게 중소기업 적합업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중소기업에 적합하느냐보다 ‘전문기업이냐 아니냐’로 판단해야 해요. 사이즈 기준으로만 ‘대기업은 안 되고 중소기업만 하라’ 하면 네슬레 같은 글로벌 식품기업은 나올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중공업으로 큰 곳이 갑자기 고추장을 만들겠다는 식이라면 안 되겠지요? 하지만 CJ가 식품 전문기업이면 네슬레처럼 되도록 도와줘야죠.”

그는 대기업-중소기업이라는 프레임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30년 전과 마찬가지로 중소기업과 대기업이라는 이분법으로만 보면 ‘월드 베스트’ 기업은 탄생할 수 없어요. 손톱깎이를 만들어도 세계 1위 하는 전문기업을 육성하는 게 중요합니다.”

식품 제조업이 주 전공이 아닌데도 자본력을 무기로 밀고 들어오는 회사에 대해서는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빌 게이츠가 마이크로소프트의 구내식당을 운영하지는 않죠. 그러나 우리는 일부 재벌들이 자기 회사와 협력업체 식당을 자신이 운영해요. 이래서 언제 전문기업이 나오겠습니까. 글로벌 시대에 재벌은 세계 1위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고, 내수산업은 전문기업에 단계적으로 이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젊은이들도 창업하지요.”

동원그룹도 대기업인데…. “사실 동원은 이미 국내에서 입지를 굳혔고, 이제 글로벌 식품기업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아직 글로벌 기업으로 가기에는 영세한 중소기업들이 전문기업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이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만 쓰는 ‘재계 순위 몇위’ 이런 표현도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문어발식 확장을 부추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세계 인재 키우려면 영어 공용화를

“좀 드시면서 하세요.” 식사가 어느 정도 이어지자 주인이 누룽지를 들고 왔다. 보리굴비장아찌, 굴비젓, 조개젓을 오밀조밀 얹은 접시가 함께 올려졌다. 박 회장은 “골고루 먹지만 고기는 많이 먹지 않는다”며 각종 밑반찬을 싹싹 비웠다.

"영어 공용화하면 소득 1만弗 더 늘어날 것"

박인구 식품공업협회 회장 "주6일 운동…축구는 '경영 엔도르핀' 솟게 하는 힘"
저녁 자리가 후반으로 접어들어 화제를 개인사로 돌렸다. 그는 젊었을 때 ‘시험 선수’라는 얘길 많이 들었다고 했다. 고교 졸업 직후 9급 검찰 사무직에 합격했고, 대학 2학년 때 교사 자격증을 땄고, 교사 시절에는 7급 감사원 감사직과 행정고시에 동시 합격하기도 했다. 공직 입문 후에는 미국 험프리 펠로 장학생 선발 과정을 통과해 유학을 다녀왔다.

외국에서 9년간 생활했지만 아직 외국어에 부족함을 많이 느낀다고 했다. “(동원그룹이 2008년) 스타키스트를 인수하면서 뼈저리게 느꼈던 게 ‘내 영어가 부족하다’는 것이었어요. 일상 대화하는 수준이지, 외국 직원들과 토의하고 논쟁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어요.”

박 회장은 ‘영어 공용화’가 소신이라며 이와 관련한 과학적 근거와 주장들을 차곡차곡 모아 놓고 있다고 소개했다. “열두 살 이전, 어려서부터 영어를 배워야 하고, 아예 영어를 우리말과 병행해서 공용어로 써야 합니다. 지금 초등학생들이 영어교육을 많이 받지 않느냐고 하는데, 영어를 사교육에만 맡기면 ‘잉글리시 디바이드’가 생깁니다. 교환학생이다, 어학연수다, 있는 집 애들만 영어를 잘 하게 됩니다. 누구나 영어를 잘 구사하게 만들어야 젊은이들이 해외로 나가서 취직도 하고 창업도 합니다. 영어 공용화를 준비한다면 10년은 걸리겠지만, 성사되면 국민소득이 바로 1만달러 더 올라간다는 얘기도 있어요.”

영어 공용화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설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나 혼자 함부로 주장하면 우리 제품 불매운동 일어날까봐 말 못해요, 하하. 내 경험으로는 이 길이 살 길인데. 여러 학자들이 백가쟁명해서 공감대를 높여 가야겠지요.”

●CEO는 고독한 자리…스스로 낮춰야죠

그와 함께 일하는 동원그룹 젊은 직원들을 만나면 “부회장을 인간적으로 좋아한다”는 얘기를 하곤 한다. CEO를 신격화(?)하다시피 하는 곳도 있는데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솔직히 위로 올라갈수록 고독해집니다. 사원들과 밥을 먹어도 부회장 옆은 부담스러워해요. 친구들도 제가 CEO가 되고 나선 예전만큼 먼저 찾아오지 않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understand)는 것은 ‘under’에 ‘stand’한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먼저 낮추고 다가가지 않으면 안 돼요. 함께 축구하고 부대끼면 훨씬 가까워지고요.”

후식으로 나온 ‘다방 커피’를 마시며 2012년 새해 계획을 물었다. “무한히 흘러가는 시간을 인간이 인위적으로 잘라 구분할 따름이지 새해라고 해서 별 차이가 있나요. 다만 더 새로워지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목표를 꼽자면 중국어를 마스터하는 것입니다. 같이 공부할 직원들을 찾고 있어요.”

박인구 식품공업협회 회장 "주6일 운동…축구는 '경영 엔도르핀' 솟게 하는 힘"

박인구 회장의 단골집 가족회관

정·재계인사 단골…저녁코스는 제대로 된 남도의 맛

광주(光州)에서 10년, 역삼동으로 옮겨 19년, 합치면 29년 동안 정통 전라도 한정식을 고집하고 있다. 정·재계 유명 인사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적잖은 가짓수의 반찬이 나오지만, 남길 것이 없을 정도로 실속있게 차린다. 저녁 코스의 삼합에 나오는 홍어는 서울 사람들을 배려해 적당히 삭혔다. 민물새우탕인 세뱅이찌개, 법성포에서 공수해온 보리굴비, 싱싱한 전복 개불 멍게, 깊은 맛의 토하젓 등이 남도의 맛을 제대로 보여준다. 계절에 따라 싱싱한 제철 음식으로 메뉴를 조금씩 바꾼다. 1월 이맘 때에는 매생이가 제맛이다.

점심은 2만5000~3만5000원. 저녁은 3만5000원, 5만원, 7만원 코스가 있다. 영업시간은 오전 11시~오후 10시. 일요일은 쉰다. 미리 예약하는 게 좋다. (02)567-2128, www.familyhall.co.kr


임현우 기자 tardis@hankyung.com

박인구 식품공업협회 회장 약력

▶1946년 광주광역시 출생 ▶조선대 법학과, 조선대 대학원(국제법), ▶미국 USC 대학원(퍼블릭파이낸스) ▶행정고시 21회 ▶주미국상무관, 주유럽공동체(EC)상무관, 상공부 부이사관 ▶現 동원그룹 부회장, 동원육영재단 이사 ▶現 무역협회 이사, 한식재단 이사, 한국음식관광축제 조직위원회 위원장, 전주국제발효식품엑스포 조직위원회 위원장 ▶국무총리 표창, 대통령 표창, 대한민국해양대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