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창근 칼럼] '쓰레기' 네트워크서비스
인터넷이 만드는 신기한 세상에 사람들이 열광하던 1996년 2월, ‘네트(net)의 히피’로 불리는 미국 존 페리 발로가 ‘사이버공간 독립선언문’이란 걸 발표한다. “산업세계의 정권들, 지겨운 괴물아. 미래의 이름으로 너 과거의 망령에 명하노니 우리를 건드리지 마라”로 시작하는 이 격문은 권력의 주체가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모든 개인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강조한 인터넷 자유주의자들의 바이블이다.

선언문은 “네게는 우리 영토(사이버공간)를 통치할 권한이 없다. 너희의 모든 법은 우리와 무관하다. 너는 우리를 지배할 도덕적 권리나 강제적 방법도 없다. 갈등과 문제가 있으면 우리 방법으로 밝히고, 사회계약을 만들 것이다. 우리는 아무나 들어가고, 누구든 어디에서나 믿음을 표현하는 세상을 만들고 있다”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국가와 영토의 구분, 기존의 모든 권위·질서·가치에 대한 부정이다.

세상은 확실히 그의 말대로 바뀌었다. 인터넷은 초기 포털의 일방적 콘텐츠 공급 형태에서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등 누가 무엇이든 말하고 누구와도 얘기를 주고받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라는 이름의 개인 미디어로 진화했다. 이것이 수많은 사람들을 엮어 거대한 무리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집트 등 중동국가의 철권독재를 일순간에 무너뜨릴 만큼 세상을 뒤집는 엄청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사이버공간이 민주적 소통의 장(場)으로 기능하는 것은 여기까지다. 한꺼풀 들추면 쓰레기가 넘쳐난다. 집단적 관음(觀淫)·괴담·음모·무책임과 증오표출의 공간이다. 바쁘게 A양 동영상을 퍼나르다가 다시 그것은 선관위에 대한 디도스(DDoS) 공격사건의 물타기 음모라고 주장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되면 수돗물 값이 크게 올라 빗물을 받아쓰게 되고, 맹장수술비가 지금 30만원에서 900만원으로 치솟는다’는 괴담, 현직 판사의 적개심 가득한 ‘가카의 빅엿’ 등등. 악성 바이러스가 그속에서 무한증식되고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믿고 좋아라 박수치고 있다. 자연스런 인간 심리다. 사람들은 상식적 추론과 진실보다는 듣고싶고 믿고 싶은 입맛에 맞게 왜곡된 정보에 탐닉한다. 또 괴담과 욕설일수록 더 자극적이고 흥미롭다. SNS는 그것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제대로 판단할 겨를 조차 없이 빠르게,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동시에 유포돼 여론을 오도한다.

여기에 책임이라곤 없다. 오히려 아무 글이나 올리기만 하면 멈춰지지 않고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되는 SNS의 속성을 악용하는 집단들이 기승을 부린다. 이들은 정치적 목적이나 경제적 이득을 위해 끊임없이 이슈를 날조하고 괴담과 음모론을 퍼뜨린다. 사람들은 그걸 소통으로 착각하지만 실상 극소수의 악의적 집단에 일방적으로 속고 세뇌당하고 있는 것이다. 여과장치 없는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의 무한자유가 낳은 가장 나쁜 타락이다.

사이버공간은 더 이상 가상세계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네트워크에 접속하면서 현실공간 그 자체가 됐다. 현실사회의 질서와 도덕률, 원칙의 치외법권 지대일 수 없다는 얘기다. SNS가 개인의 사적(私的) 미디어냐, 공적인 공간이냐 하는 논쟁도 무의미하다. 접속한 개인들이 주고 받는 얘기는 결코 그들만의 은밀한 뒷담화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형성한 집단이 공유하고 전파시키는 미디어로서 공적 성격을 갖는다. 절제되지 않은 자유가 쏟아내는 쓰레기로 인해 사회가 더럽혀지고 누군가 피해를 입는다면 반드시 상응한 책임을 물어야 할 이유다.

문제는 익명과 개방을 전제로 한 열린구조의 사이버공간은 사실상 규제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도덕적 원칙인 자율과 자정(自淨)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스스로의 악(惡)을 정화할 에너지가 남아 있는지 의문이다. 대통령과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전문가 집단, 언론까지 불신받는 등 신뢰기반이 무너진 사회다. 오염이 너무 깊어지면 회복할 방법이 없게 된다.

추창근 기획심의실장·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