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식날 동료 앞에서 아픈척 약봉지 '찌익'~주당이 "건배" 외치면 슬그머니 고기굽기 모드로
로마 속담의 한 대목. “첫잔은 갈증을 면하기 위해, 둘째 잔은 영양을 위해, 셋째 잔은 유쾌하기 위해, 넷째 잔은 발광하기 위해 마신다.”

뭘 얘기하냐고? 물론 술 얘기다. 로마에서는 갈증을 면하기 위해 시작해 발광할 때까지 마셨을지는 모르지만, 우리 김과장 이대리들의 연말 술자리는 솔직히 처음부터 발광하기 위해 모인 경우가 많다. 올 한 해를 마무리할 처절한 전투가 벌어지는 연말 술자리 풍경과 다음 날 숙취 해소를 위한 ‘나만의 비타민’ 복용법을 2회에 나눠 싣는다.

◆술 때문이야~

주량은 술자리 횟수와 비례한다고 하지만, 건축회사에서 일하는 신 대리는 술 실력보다는 몸무게가 훨씬 많이 늘었다. 술 마신 다음 날이 늘 걱정인 그는 술자리가 있으면 자신만의 사전 준비 작업에 들어간다. 든든한 식사로 미리 속을 충분히 채운다. 저녁 식사 전 틈을 내 미리 밥을 먹고 가는데,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위벽이 보호된다는 얘길 믿고 매뉴는 주로 치킨이나 탕수육으로 정한다. 입사 후 그렇게 1년6개월, 그의 몸무게는 20㎏ 가까이 늘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신 대리는 요즘 술 자리 사전 메뉴를 간편식으로 바꿨다. 그래서 택한 것이 초콜릿과 우유다.

지난해 한 대기업 구매팀의 송년회 자리. 송년회 타깃은 자연스레 신입사원들이었다. 그들을 중심으로 연신 잔이 돌아가며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던 때, 선배들이 주는 술잔을 힘겹게 받아 마시던 한 신입사원이 갑자기 코피를 터뜨리며 정신을 잃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그렇듯 쓰러지는 일은 항상 ‘고귀한 분’들의 몫인가 보다. 그 역시 회사 고위 임원의 아들이었다. 송년회의 흥겨운 분위기는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응급차가 오고 팀장은 물론 상무까지 부랴부랴 응급실로 달려갔다. 올해 이 팀의 송년회 자리는 이미 11월 초에 깔끔하게 정해졌다. 와인 한두 잔과 스테이크로 이뤄진 저녁 식사에 이어 대학로에서 연극 관람으로.

만취의 절정은?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하극상’이다. 유통업체 직원 박 과장은 술만 먹으면 이름을 불러대는 버릇이 있다. 평소엔 조용한 그가 술이 머리끝까지 오르면 부르는 이름. “야! 김철수!” 물론 그의 부장 이름이다. 광고회사의 정 대리는 술만 마시면 이종격투기 선수가 된다. 주특기는 헤드락. 얼마 전 프로젝트를 마친 뒤 회식자리에서 만취한 그는 팀장에게 “그동안 서운했다”며 대들었고 결국 헤드락까지 걸었다. 다음 날 그를 바라보는 팀장의 눈빛에는 불꽃이 튀었지만, 정 대리는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폭탄주 레시피의 진화

김과장 이대리들의 술자리에서 ‘약방의 감초’격은 단연 폭탄주다. 무궁무진하게 변신하는 폭탄주 레시피는 세태를 반영하기도 한다.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사건 등이 있은 후에는 ‘안보형’ 폭탄주 레시피가 많이 등장했다.

‘천안함 폭탄주’는 맥주잔에 써 있는 맥주 브랜드 글씨 밑단까지 맥주를 채운뒤 소주잔을 맥주 위에 띄운다. 그 뒤 양 손에 든 젓가락으로 맥주잔을 포격하듯이 힘차게 강타해 소주잔이 가라앉도록 한다. 소주잔이 가라앉을 때 맥주와 섞이면서 내는 ‘환상적인’ 맛이 천안함 폭탄주의 백미다. 젓가락으로 맥주잔을 쳤을 때 한번에 가라앉지 않는다면 이 술은 벌주로 제조자가 마셔야 한다.

수류탄주는 다채로운 볼거리를 제공한다. 맥주캔을 딴 뒤 맥주를 반쯤 따라내고 그 위에 소주 또는 양주를 적당량 투입한다. 입구를 막은 뒤 ‘격하게’ 흔든 후 손을 떼는 동시에 입을 갖다 대 마신다. 수류탄주에 매료된 김 과장의 회상. “탄산이 많아서 입을 떼면 술이 뿜어져 나와 옷이나 머리가 다 젖는 수가 있어 함부로 시도하다간 큰 코 다치기 십상이죠. 하지만 다 마신 캔을 통쾌하게 천장에 ‘투척’할 때 기분과 짠하게 터져나오는 박수 소리는 삶의 활력을 불어넣는 것 같아요.”

안보형 폭탄주가 간단히 제조할 수 있는 반면 복잡한 제조 방법을 지닌 폭탄주들도 적지 않다.달달한 맛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인기인 ‘흑심주’가 그렇다. 소주잔에 콜라를 채운 뒤 그 위에 소주잔을 다시 얹고 이번에는 소주를 채운다. 잔 사이로 콜라가 스멀스멀 차오르는 상태를 ‘흑심’이라고 부른다. 콜라 때문에 가운데 부분이 검은색이 되기 때문이다. 제조된 흑심을 맥주잔에 넣고 맥주는 소주가 차 있는 높이까지 채운다. 이후 회오리주를 만들듯 입구를 휴지로 막고 휙 돌려서 섞으면 달콤한 맛의 ‘흑심주’가 완성된다.

◆‘술 자리 꼼수’

술만 보면 도망가고 싶은 이들에게 12월은 악몽의 달이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술자리에서의 ‘포지셔닝’이다. 화장실 가까운 쪽이나 밖으로 나가기 편한 곳을 먼저 ‘찜’해야 한다. 본격적으로 폭탄주가 돌거나 파도타기, 러브샷이 오갈 시점에 맞춰 자유자재로 들락거릴 수 있는 자리여야 한다.

소주 두 잔이 치사량인 의류회사 강 대리는 문 앞자리를 뺏겼을 때에는 그 모임 내 최고 ‘주당’의 움직임을 주시한다. 문 앞자리 명당을 차지하지 못했다면 몸이 피곤한 걸 감수하는 수밖에 없다. 유통회사에서 근무하는 이 과장은 부서 내에서는 삼겹살 굽기의 달인으로 꼽힌다. “다 같이 건배할 때 모른 척하고 열심히 고기라도 구우면 그나마 술을 최대한 피할 수 있어요.”

중견 섬유회사에서 일하는 최 과장은 물컵을 항상 옆에 따로 갖다놓는다. 취기가 올라올 때부터는 술을 물컵에 뱉어내기 시작한다. 술집에 투명한 물컵밖에 없을 때를 대비한 나름대로의 ‘비기’도 갖고 있다. 유리컵에 얼음을 넣어 달라고 한 뒤 받은 소주잔의 술을 옮겨 담는다.

그러나 행동이 재빠르지 않거나 술을 버린 후에도 자연스러운 표정이 자신없다면 시도조차 않는 것이 좋다. 윤 과장은 지난해 송년회에서 그렇게 한 모금씩 채워놓은 잔을 옆자리에 앉은 부장이 물인 줄 알고 마신 이후 철저한 감시 대상이 됐다.

‘국민약골’을 자처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은행원인 이 대리는 약한 몸을 내세워 술을 피해간다. 지난해 식도염에 걸렸을 때는 병이 3개월 만에 나았는데도 반년 이상 식도염을 핑계로 술을 안 마셨다. 이 대리는 “일단 아픈 이미지로 굳어지니 이후에도 술을 덜 권한다”며 “회식이 예정된 날에는 점심식사 때부터 일부러 약봉지를 찢고 약을 먹는 모습을 동료들에게 보여주기도 한다”고 했다. 물론 약은 모두 영양제다.

윤정현/윤성민/노경목/강유현 기자 h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