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증세'…부도위기 유럽 어쩔수 없이, 한국은 선거에서 이기려고
세계 주요국 가운데 가장 튼튼한 재정을 보유하고 있다고 자부해온 대한민국이 증세 논란에 휩싸였다. 야당과 시민단체들이 ‘부자 증세’ 공세를 퍼붓고,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은 ‘내년 선거를 위해서라도 고소득층 증세가 불가피한 것 아니냐’며 맞장구를 치고 있다. 청와대도 국회가 요구하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재정이 휘청거리고 국가 부도 직전의 상태라면 정치권과 정부는 당연히 ‘증세’에 나서야 한다. 높은 세율로 인해 장기적으로 사업·근로 의욕이 떨어지고 성장 기반이 취약해지더라도 당장 급한 불은 꺼야 하기 때문이다.

유럽 국가들에서 나타난 증세 움직임이 그런 사례다. 사실상 국가 부도가 난 그리스를 포함해 이탈리아 핀란드 헝가리 포르투갈 등 증세를 추진하는 나라들은 재정위기의 한복판에 있는 유럽 국가들이다. 일부 부자들도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겠다며 동조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세계 주요국 가운데 ‘내후년에 균형재정을 달성하겠다’는 나라다. 경제성장의 과실이 국고를 꼬박꼬박 채워 지난해에만 7조원이 넘는 세계잉여금을 냈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이겨내기 위해 2009년 풀었던 43조원(관리대상수지 기준)의 적자재정을 불과 4년 만에 ‘균형’으로 바로잡을 자신이 생길 만큼 국고가 튼튼해졌다.

한국의 국가채무 비율은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33.4%로 주요 20개국(G20) 평균치(77.8%)의 절반 수준이다.

하지만 내년 국회의원 총선거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은 ‘증세’를 외치고 있다. 국민의 대다수인 중산층과 서민의 세 부담은 그대로 둔 채 고소득층과 부자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고 말한다.

김진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29일 “1% 특권층만 살찌고 99% 중산층의 삶은 무너지는 1 대 99의 사회가 됐다”며 “상위 1% 계층에 부자 증세를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홍준표 대표도 전날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 서민예산 증액을 위해 소득세 최고 구간 신설 문제를 검토해 달라고 요청했다.

MB노믹스(이명박 정부의 경제철학)의 핵심으로 ‘감세’를 주창했던 청와대는 증세에 부정적이지만 여당이 밀어붙이면 끝까지 반대할 수 없는 처지다. 내년 예산안과 세법 개정안 처리 시한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국가를 이끄는 청와대와 국회가 정치논리에 빠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내년 우리 경제가 최악으로 치달을 수 있을 정도로 상황이 나쁘다는 점이다. 유럽 위기로 수출 환경이 급속히 악화하는 가운데 자동차 가전제품 등 내수 소비마저 얼어붙고 있다.

중소기업은 물론 대기업마저 “내년 사업계획을 어떻게 짜야 할지 캄캄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급작스러운 조세정책 변화는 또 다른 충격으로 작용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세율을 올리더라도 기대하는 만큼 세수를 늘리기 어렵고 사업·근로 의욕 상실 등으로 인한 경제활력 둔화 등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한다.

좌승희 경기개발연구원 이사장은 “세수 증대를 위해서라면 세원 양성화와 비과세·감면 축소 등 다른 방법들이 얼마든지 있다”며 “국가의 근간인 조세가 내년 선거를 위한 정치권의 홍보성 정책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서욱진 기자 ventur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