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중국의 전족 풍습, 왜 조선엔 없을까
친할머니보다 외할머니가 아이를 맡아 키우는 집이 많은 까닭은 무엇일까. 흔한 말로 딸 가진 죄 때문일까. 이순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이 《조선의 가족 천개의 표정》(너머북스,236쪽,1만5000원)에서 내놓은 해석이 재미있다. 옛날 혼인풍속이 외가 쪽과 관계를 더 가깝게 만들지 않았느냐는 설명이다.

요즘은 여자가 시집살이를 하지만,옛날엔 남자가 처가살이부터 했다. 여자 집에서 혼례를 치르고 여자 집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남자는 자신의 본가와 처가를 주기적으로 오가거나 아예 처가에 눌러사는 경우가 많았다. 여자가 '시집을 가는' 게 아니라 남자가 '장가를 가는' 형식이었다. 신사임당도 혼인한 지 20여년이 지난 다음에야 완전히 시댁으로 살림을 옮겼다고 한다. 이런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의 관습은 16세기까지 유지됐다. 시골에서는 신부가 1,2년 친정에 있는 '해묵이'가 20세기 초까지 남아 있었다.

자연히 여자들의 입김도 셌던 모양이다. 당시 여자들은 며느리보다 딸로서의 정체성이 강했다고 한다. 자녀들이 돌아가며 올리는 '윤회봉사'나 분담해서 지내는 '분할봉사' 등을 통해 딸들도 친정 제사에 참여했고,재산도 아들들과 똑같이 상속받았으니 그럴 만하다. 혼인이라는 게 집안끼리의 대등한 결합이고,여자집안은 든든한 지원군이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저자는 딸들의 친정 제사 참여와 관련,"이런 관습이 남아 있다면 요즘 며느리들이 겪는 명절증후군도 없을 것"이란 얘기도 꺼낸다. 또 "오랜 기간 동등한 재산권을 누려온 우리나라 여자들은 기본적으로 재산관리 감각이 있을 수밖에 없다"며 요즘 남자들이 월급을 만져보지도 못하는 세태를 풀이하기도 한다.

중국의 전족이 조선에는 없는 이유도 딸들의 가족 내 위상이란 프리즘으로 들여다본다. 조선의 여인들은 성적 파트너라기보다 집안 공동운영자로서의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에 중국 여인들처럼 성적 이미지에 집착할 이유가 없었다는 해설이다.

이 밖에 저자는 적처와 적자,종부,종손,양자,서얼,첩,기생 등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의 갖가지 사연을 통해 개인이 아니라 가족 중심으로 돌아갔던 조선 사회의 단면을 흥미롭게 비춰준다.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