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여보, 언제까지 주말마다 등산 갈 거야?" "이젠 안 가도 돼…다음 주에 부장 바뀌니까"
토요일 새벽 5시.올해 초 입사한 이모 사원은 토요일만 되면 평일보다 두 시간 일찍 일어난다. 회사 야구 동호회 연습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야구 열혈팬인 본부장이 새로 온 뒤 사내에는 야구단이 '급'결성됐다.

본부 내 모든 남자직원들은 본부장 눈치 보느라 매주 토요일 야구 연습,마지막주 토요일 친선 대회에 '출근부'찍듯 참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씨는 "막내라고 다들 하기 싫어하는 포수를 떠맡게 됐다"며 "야구의 'ㅇ'자도 모르는데 공받는 것도 무섭고 다리도 저린데 다음 신입이 올 때까진 이 짓을 계속해야 할 판이니 죽을 맛"이라고 말했다.

직장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는 곳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동호회다. 동료들과 친목도 다지고 취미활동을 통해 업무 스트레스도 날려 버릴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있다. 이씨 회사의 야구단처럼 상사 눈치에 동원령이 내려지는 모임은 업무보다 더 큰 스트레스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직장 동호회에 얽힌 명암을 짚어본다.

◆선배와의 주전 경쟁

회사 동호회의 가장 큰 장점은 동료들과 친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개인적으로 얼굴도 보기 힘든 사장님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올림푸스한국의 신입사원 최모씨는 월례조회 시간에 사내 밴드동호회 '올밴'의 공연을 보고 깜짝 놀랐다. 멤버 중 드러머가 바로 방일석 사장이다. 취미로 기타를 배우고 있던 최씨는 그날로 당장 밴드에 가입했다. 그는 "음악 얘기를 할 때는 대표와 1년차 사원 사이에 경계가 없어진다"며 "사장님과 함께 동호회를 하며 쉽게 대화한다는 것이 사내에서도 부러움의 대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선후배가 동호회 활동을 함께하면서 불편한 관계에 놓이는 경우도 있다. 모 은행의 신입 행원인 정모씨는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했던 농구 동호회에 들었다. 정식 농구코트 등 좋은 환경에서 농구를 할 수 있겠다는 기대는 잠시뿐,곧바로 고민이 생겼다. 사수인 김 대리와 '포인트 가드'라는 포지션이 겹치는 것이다. 사내에서 농구할 때는 상관 없지만 다른 동호회와 시합을 벌이게 되면 아무래도 잘하는 사람이 대표선수로 나갈 수밖에 없는 법.1 대 1 시합으로 진행된 '주전 경쟁'에서 정씨가 몇 번 이기자 김 대리는 자신이 이길 때까지 시합을 걸어왔다. 정씨는 "괜히 동호회에 들었다가 선배와 사이만 어색해졌다"며 "김 대리의 승부근성은 사내에서도 유명해 일부러라도 다음부터는 져줘야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올해 결혼 3년차인 식품업체 직원 최모 대리는 주말이 되면 아내의 원성을 자주 산다. 등산광인 부장의 강권에 못 이겨 사내 산악회에 가입한 후 매달 첫째,셋째 토요일에는 아내를 '토요 과부'로 만든다. 최 대리도 초창기에는 가끔씩 산악회 활동에 빠졌으나,그때마다 부장의 곱지 않은 시선을 느끼곤 요즘은 꼬박꼬박 눈도장을 찍는다. 그런 최 대리에게 희소식이 생겼다. 부장이 지방 공장으로 발령나고,새 부장이 오기로 내정돼 있는 상태.물론 더 좋아하는 사람은 그의 아내다. "자기야 이번 주말 드라이브 갔다가 맛있는 것 먹자."

◆나도 아나운서다

동호회가 꿈을 대리만족시켜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외국계 기업에 근무하는 김모 사원은 사내 동아리 활동을 통해 학창 시절 맺힌 한을 풀고 있다. 김씨의 오랜 꿈은 방송국 아나운서.고등학교 시절 교내 방송부 아나운서를 하며 꿈을 키웠지만 방송사 시험에서 번번이 낙방해 평범한 직장인에 만족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던 그는 지난달 사내 방송 동호회에 당당히 합격해 아침마다 DJ로 활동하고 있다. 김씨는 "온 에어의 빨간 불빛을 보면 가슴이 뛴다"며 "방송을 준비하느라 일을 소홀히 한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 일도 더 열심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야구르트에 다니는 권혜미 사원은 매주 일요일이 기다려진다. 사내의 승마 동호회 모임날이기 때문이다. 한국야쿠르트의 승마 동호회는 전직 승마선수가 이끌고 있다. 승마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선수 시절을 보낸 이동혁 사원이 지난해 한국야쿠르트에 입사하면서 기꺼이 '재능기부'에 나선 것.권씨는 "친구들에게 사내 동호회에서 승마를 배운다고 말하면 다들 부러워한다"며 "특히 승마가 자세교정과 다이어트에 좋은 운동이라 기대가 크다"며 즐거워했다. 회사에서 동호회 지원금이 나오기 때문에 비용 부담도 크지 않다. 2만원만 내면 2시간 동안 말을 탈 수 있다. 소주 한 번 덜 마실 돈으로 승마를 즐기는 셈이란다.

◆무늬만 동호회 지원 규정

모 협회에 다니는 박모씨는 회사 산악회의 정기모임으로 최근 제주도를 다녀왔다. 비행기표부터 숙박,식사까지 모두 회사 지원으로 가는 일정이다 보니 동호회원이 아닌 직원들의 참여문의도 많았다. 박씨는 "한 달에 3000원씩 동호회비를 내지만 그것보다 회사 지원이 운영에 절대적"이라며 "산악회 특성상 지방으로 가는 일이 많은데 부담없이 다녀올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한화그룹의 사격 동호회도 유명하다. 한화그룹에는 계열사 별로 사격동호회가 있다. 주기적으로 동호회 대항전을 치르는 등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사격에 애정이 많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김 회장은 2002년부터 사격연맹 명예회장직을 맡아오면서 재정적인 후원을 하고 있다. 또 '갤러리아사격단'을 창단하고 '한화회장배' 사격대회를 창설하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회사가 동호회에 적극적인 것은 아니다. 마음맞는 사람들끼리 댄스스포츠 동호회를 만들려고 준비했던 이모 과장(36)은 최근 회사의 동호회 지원 규정을 살펴보다 한숨만 내쉬었다. 지나치게 엄격하고 짠 세부규정 때문이었다. 규정엔 '건전하고 품위있는 레저,스포츠에 한한다''목적과 내용,구성원에 대해 경영팀의 심사를 받고 대표이사의 승인을 받는다''15인 이상 참여를 조건으로 한다''3개월간 불참 인원은 제외한다''한 달에 1인 당 1만원 내 실비 지원' 등 까다로운 조건들이 덕지덕지 달려 있다. 이모 과장은 "사내 동호회를 장려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동호회 설립을 막으려는 경고문구 같다"고 푸념했다.

강영연/노경목/윤성민/윤정현기자 yy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