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가을에 떠나는 여행은 행선지를 묻지 말라는 말이 있다. 어딜 가도 좋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요즘 전국의 산과 들은 가을을 즐기려는 인파로 넘쳐난다. 설악산, 내장산 등 전국의 유명한 산과 계곡엔 붉디붉은 단풍보다 더 울긋불긋한 등산복 행렬이 꼬리를 문다. 단풍 명소에는 단풍 구경을 하는 것인지 사람 구경을 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사람 천지다.

단풍을 보고 싶긴 한데 북적이는 사람에 치일까 걱정하던 차에 여행벗들이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을 전해왔다. 전북 부안의 외변산과 내변산을 트레킹하고 야영을 함께하잔다. “맞다! 이거다.” 누구나 한 번쯤은 가봤거나 익히 알고 있는 그런 곳으로의 여행이 아니라 사람이 많지 않으면서도 이 가을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 황금 들녘을 걷고 누렇게 변해가는 숲길을 걷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 가을만의 선물인가. 두말 않고 ‘오케이’ 사인을 보내고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부안 하면 떠오르는 변산반도는 바다를 아우르는 외변산, 내소사와 직소폭포가 자리한 내변산으로 나뉘어 서로의 풍광을 뽐내는 곳이다. 이번 여행길은 새만금방조제 입구에서 시작하는 외변산의 일부인 ‘부안 마실길’을 트레킹하여 마실길 1구간 2코스를 통과해 고사포 해변의 고사포 야영장에서 야영을 하고 다음날 변산 8경 중 하나인 직소폭포를 거쳐 월명암을 지나 남여치로 하산하는 코스. 산행과 걷기, 야영까지 곁들여 가을을 진하게 만끽할 수 있는 ‘백패킹 여행’이다.

여행의 길동무는 ‘다음 카페’의 여행동호회 ‘백패킹하는 사람들’의 멤버들. 대형 배낭에 각자 텐트와 취사 장비 등을 넣고 유유자적 여행을 하며 대자연 속에서 하룻밤 캠핑을 하는 백패킹 여행은 참으로 친자연적이고 소박하다. 철칙처럼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식사와 숙박을 직접 해결해야 하므로 불편이 따르지만 ‘참여행’을 추구하는 이들에겐 ‘즐거운 불편’일 따름이다. 이 땅의 속살들을 두발로 디디며 직접 접촉하는 기쁨과 감동은 그 정도 불편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는다.

[Leisure&] 전북 부안 트레킹, 마실 가자…변산으로

첩첩산중 그곳엔 찻길도 없거늘…1300년 된 월명암엔 역사의 상흔이

3㎞ 고사포 해변 트레킹…야영장 송림엔 별이 총총
직소폭포 넘어서니 오르막 급경사에 숨이 턱…산속 이 암자 누가 지었는지


서울 센트럴터미널에서 동호회원 20여명과 만나 미리 인터넷으로 예매해 둔 부안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서울을 벗어나 황금 들녘을 바라보자 왠지 마음이 뿌듯하다. 10월의 주말, 도로를 가득 메운 승용차 행렬을 비웃기라도 하듯 고속버스는 전용차선을 씽씽 내달린다. 그렇게 3시간여를 달려 부안에 도착, 군내 버스를 타고 새만금방조제 전시관에 도착했다. 여기가 바로 ‘부안 마실길’의 들머리다.

조수 간만이 큰 외변산 해안의 ‘부안 마실길’은 썰물과 밀물에 따라 코스가 달라진다. 물이 들어차 있을 땐 바닷가 절벽 위의 오솔길로 트레킹을 해야 하지만 물이 멀리까지 빠졌을 땐 드러난 백사장을 따라 손에 잡히는 바다를 우측에 끼고 그야말로 환상적인 ‘해안 트레킹’ 을 할 수 있다.

새만금방조제 입구의 마실길 들머리에서 오늘의 숙영지인 고사포 해변까지는 약 9㎞. 3시간이면 넉넉한 코스로 완만한 바닷길이 수평선과 맞닿아 이어진다. 걷는 도중 돌출된 언덕을 돌아나가면 이름 없는 작은 백사장이 나오고 그 백사장이 지루할 즈음엔 깎아지른 갯바위 절벽이 막아선다. 조심조심 더듬 거리며 갯바위 절벽을 돌아나가면 또 다른 백사장이 나오는, 그야말로 지루할 틈마저 없는 빼어난 트레킹 코스다.

희희낙락하며 길을 걷다 보니 서해 낙조 중 으뜸으로 친다는 고사포의 광활한 해변이다. 고사포는 3㎞에 달하는 긴 해변을 지닌 곳으로 방풍림으로 심어놓은 300m 길이의 해송 군락지가 장관이다. 더구나 그 소나무 군락지 안에서 야영까지 할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다. 일반야영은 물론 오토캠핑까지 가능하도록 시설물을 갖추고 있다.

우리 일행도 고사포 야영장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일행들은 대부분 야영에 익숙한 지라 20여동의 작은 텐트들이 모인 동네 하나가 금세 뚝딱 완성됐다. 각자 저녁을 지어 먹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빼곡한 송림 사이로 문득문득 보이는 달과 별들이 어쩌면 저리도 초롱초롱할까 싶다.

이틀째는 내변산 산행이다. 내변산은 최고봉인 관음봉을 오르기 위해 내소사 방향에서 오르기도 하지만 그 코스는 다소 길고 험하다. 일행 가운데 어린이도 있어 오늘은 관음봉 코스 대신 좀 더 수월한 노선을 택한다. 고사포 군내버스를 타고 원암마을로 이동한 다음 재백이 고개를 넘어 직소폭포를 지나 월명암으로 해서 남여치 날머리로 하산하는 총거리 8㎞ 코스다. 소요시간은 4~5시간, 난도는 중급 정도다.

내소사에 닿기 전에 있는 원암마을의 원암매표소가 오늘의 산행 들머리다. 재백이 고개까지 오르는 바위길의 경사가 다소 가파르지만 고개 정상에 올라 한눈에 들어오는 곰소만의 염전과 해안의 탁트인 전경이 가빴던 숨을 충분히 보상해 준다.

고개마루부터는 다소의 내리막과 직소폭포를 향해 흐르는 산속 계곡을 따라 이어진 숲속 오솔길이 탄성을 자아낸다. 깊은 숲속 오솔길의 고즈넉한 아름다움에 취할 즈음 낙차가 30m를 넘는 내변산의 하이라이트인 직소폭포의 위용이 발아래 펼쳐진다.

직소폭포에서 월명암 방향의 산행에는 다소 험한 오르막 코스가 이어진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르막과 내리막, 산허리를 돌아가는 절개지 오솔길을 따라 가면 1300년의 역사를 지닌 월명암이 산중에 숨은 듯 소박한 모습을 드러낸다. 이리도 깊은 산속의 월명암이 어찌 그리도 많은 역사의 부침에 반복적으로 희생됐는지 쉬 상상이 되지 않았다.

신라시대에 창건된 월명암은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에 전소돼 재건하기를 반복하고 그도 모자라 6·25 전쟁 직전 여순반란 사건의 무대가 되어 또 한 번 전소됐다. 거듭되는 수난을 겪으면서도 아픈 역사를 간직한 채 꿋꿋이 버텨온 월명암이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 봐도 절 주변에는 차가 다닐 만한 도로가 전혀 없다. 그저 사람 하나 왕래할 좁디좁은 오솔길이 전부였다. 제법 규모가 있으며 부속 건물도 많은 이 사찰을 어떻게 지었는지 궁금했다. 산행을 마치고 남여치로 하산해 변산을 다시 보니 가을빛이 완연하다. 번잡한 인파로 몸살을 앓는 유명 여행지를 피해 고즈넉하게 이 가을을 즐기고 싶다면 변산으로 떠나보시라.

[Leisure&] 전북 부안 트레킹, 마실 가자…변산으로

■ 찾아가는 길

서울 센트럴터미널에서 부안행 고속버스를 타고 부안에 도착, 터미널 근처의 군내버스 정류장에서 농어촌마을버스 1번을 타고 새만금전시관에 하차한다. 바로 앞 바닷가에서 마실길 표지판을 길잡이 삼아 진입한 후 변산해수욕장과 고사포를 거쳐 격포까지 총거리 18km의 마실길이 이어진다. 직소폭포는 내소사 방향에서 오를 수도 있으나 좀 더 완만하고 짧은 코스도 있다. 원암매표소~재백이 고개~직소폭포~자연보호헌장탑~월명암~남여치매표소로 이어지는 7.8km 구간으로 4시간가량 걸린다.

글·사진/황훈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