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 최고경영자(CEO)로서 더 이상 나의 의무를 수행할 수 없는 날이 온다면 가장 먼저 여러분에게 알리겠다고 말했습니다. 불행히도 그날이 왔습니다. "

지난 8월 말 스티브 잡스가 애플 이사회에 보낸 편지가 공개됐을 때 그 울림은 너무 컸다. 잡스는 퍼스널 컴퓨터 시대를 여는 데 한 축을 담당한 사람이다. 또 다른 한 축을 맡았던 빌 게이츠는 몇 년 전에 이미 마이크로소프트의 중책을 벗고 자선사업가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는 자기 의지대로 현장을 떠났다. 그러나 잡스의 퇴장이 애잔한 여운을 남기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닌 병마가 인생의 정점에 있는 그를 끌어내렸기 때문이다.

이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무대에서 내려와 퇴장하면서 우리를 퍼스널 컴퓨터 시대로 이끈 두 거인의 경쟁 드라마는 이제 진행형이 아닌 마침표를 찍어야 할 때가 왔다.

◆두 천재,혁명을 꿈꾸다

잡스와 게이츠는 1955년에 태어난 동갑내기다. 그리고 대학을 중퇴한 것도 똑같다. 두 사람이 스무살 안팎의 앳된 나이로 컴퓨터 산업에 들어갔을 때는 바야흐로 마이크로 혁명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진공관을 대체할 트랜지스터와 집적회로가 발명되고 집적회로를 발명한 사람 중 한 사람인 로버트 노이스가 고든 무어와 함께 세운 인텔이라는 회사는 1968년 설립 이후 첫 3년 동안 ROM(read only memory), RAM(random access memory),CPU(central processing unit) 등 나중에 퍼스널 컴퓨터에 들어갈 중요한 부품들을 숨가쁘게 개발해냈다. '마이크로코즘'의 저자 조지 길더는 이 시기를 '기이한 3년'이라고 불렀다. 훗날 잡스와 게이츠가 자신들을 행운아였다고 말한 이유는 혁명이 일어나고 있을 때 현장에 있었고 거기서 자신들이 가장 사랑할 수 있는 일을 찾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회사를 세웠다. 잡스는 컴퓨터 대중화라는 혁명적인 발상을 했다. 21세이던 1976년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아버지 차고에 애플컴퓨터라는 회사를 차리고 전문가의 전유물이던 컴퓨터를 더 작고 더 싸고 사용하기 쉽게 만들어 일반인도 갖게 하자는 생각으로 '애플1'(1976년)에 이어 '애플2'(1977년) 컴퓨터를 내놨다. 대중시장을 겨냥한 첫 퍼스널 컴퓨터의 탄생이다.

이즈음 프로그래밍에 빠져 있던 하버드대 신입생 게이츠는 잡지에서 미니 컴퓨터 키트 '앨테어 8800'의 기사를 읽는다. 그는 이 기계에서 퍼스널 컴퓨터의 가능성을 보고 흥분했다. 동료 폴 앨런과 함께 두 달 동안 하버드대 실험실에서 '앨테어'를 움직일 소프트웨어 '베이직'을 쓴다. 컴퓨터를 누구나 쉽게 쓸 수 있게 하자는 생각으로 운영체제를 만들고 끊임없이 혁신해가는 게이츠의 긴 여정은 이렇게 시작됐다. 1975년 소프트웨어라는 단어조차 생소하던 시절 그가 세운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업계 최초의 소프트웨어 회사다.

미래를 내다보고 미래를 만들어가는 열정,최고의 두뇌들을 끌어들이고 이들이 최고를 만들 수 있도록 이끄는 리더십,어려운 상황도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전환시키는 전략과 배포,아무나 가질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이 두 천재는 가는 길이 같았기 때문에 시장에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친구냐 라이벌이냐…IT 패권 거머쥔 '동갑내기 천재'
◆경쟁과 배려

두 사람의 경쟁 드라마를 2막으로 나눠 보면 1막은 'PC 전쟁'이다. "훌륭한 예술가는 베끼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 " 잡스가 좋아하는 말이다. 그는 미국 실리콘밸리에 있는 제록스 연구소에서 지금의 마우스와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를 개발했다는 소문을 듣고 애플 엔지니어들을 이끌고 염탐하러 간다. 여기서 '훔쳐온' 기술을 바탕으로 1984년 불후의 명작 매킨토시를 내놓았다.

마우스와 키보드를 갖춘 매킨토시로 전성시대를 즐기던 애플은 최고라는 자부심의 벽에 갇혀 컴퓨터 라이선스를 오픈하지 않았다. 반면 IBM은 자신들이 개발한 PC를 공개해 누구나 만들 수 있도록 했다. 거기에 마이크로소프트의 운영체제를 탑재하면서 시장의 패권은 PC로 넘어갔다. 잡스는 1996년 "PC 전쟁은 끝났다. 오래 전에 마이크로소프트가 이겼다"며 패배를 인정했다.

비즈니스에서 경쟁이란 죽느냐 사느냐를 다투는 살벌한 것이지만 두 사람의 경쟁에는 무언가 다른 게 있었다. 상대가 어려울 때 구원의 손길을 뻗기도 하고 상대가 자기 것을 베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질게 하지 않았다.

2007년 어느날 두 사람은 디지털의 미래에 대해 대담하는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사회자가 두 사람의 관계에서 가장 오해를 받는 부분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잡스는 "10년 넘게 우리가 결혼한 사실을 비밀로 해 왔다"고 해서 좌중을 웃겼다. 모두들 라이벌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부부와 같은 애정을 가진 사이라고 빗대어 말한 것이다. 비즈니스에서 경쟁 구도에 있으면서도 상대의 뛰어남을 인정하고 상대가 크게 다치는 것을 바라지 않은 묘한 관계였다.


◆게이츠의 분전

제2막은 'PC 이후(post-PC)'를 달려간 두 사람의 행보다. 아직 최종 결말이 났다고 볼 수는 없지만 굳이 승패를 따지자면 잡스의 승리라고 할 수 있는 전쟁이었다.

2008년 게이츠가 물러날 때까지도 손을 놓지 않은 것은 마이크로소프트의 PC 운영체제인 윈도의 혁신이었다. 그의 마지막 프로젝트는 마이크로소프트를 무력화시키려는 웹 2.0 세력에 맞서 새로운 차원의 운영체제를 만드는 것이었다. 구글이 상대 진영의 선봉에 있었다. 그는 백지 상태에서 '운영체제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고 업그레이드 수준이 아닌 혁신적인 버전을 내놓기 위해 CEO 자리를 창업 동료인 스티브 발머에게 내주고 자신은 이 프로젝트에 전념했다. 5년이라는 긴 작업 끝에 2006년 선보인 '비스타'가 그것이다. 보안-검색 기능과 디지털 엔터테인먼트의 새 경지를 제공하겠다는 야심이 이 운영체제에 담겨 있었다. 하지만 비스타는 이렇다할 만한 호응을 얻지 못하고 무대에서 간단히 사라져버렸다.

그는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IT 생활의 중심은 PC라는 신념에 변함이 없다. PC의 플랫폼인 운영체제를 끊임없이 개선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07년 대담에서도 이 신념을 분명히 했다.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실은 그들이 자기 컴퓨터에서 더 많은 일을 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문서를 편집하고 창의적인 작업을 하고….그래서 더 강력한 PC를 원할 것이다. " 게이츠는 마이크로소프트를 나왔지만 발머가 그의 뜻을 이어받아 PC의 주도권을 지키기 위해 분전 중이다.

◆애플 천하…그러나 미완의 승부

그러나 잡스의 생각은 게이츠와 많이 달랐다. 특수 기능에 초점을 맞춘 많은 디지털 장치들이 탄생하고 있으며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작업들이 이 분야에서 활발하게 이뤄질 것이라고 믿었다.

2000년 여름까지만 해도 잡스는 컴퓨터에서 비디오 편집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그러다 자신이 중요한 흐름 하나를 놓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들이 냅스터와 같은 불법적인 서비스로부터 MP3 음악을 다운로드받아 컴퓨터에서 CD를 구워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잡스의 행로는 'PC 이후'에 맞춰졌다. 그리고 그의 작업은 IT생활은 물론 영화-음악-출판 등 다른 산업에까지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애플이 2001년 내놓은 아이팟과 함께 문을 연 아이튠 온라인 스토어는 한 곡당 99센트에 음악을 손쉽게 다운로드받을 수 있도록 했다. 지금 아이튠에서는 음악은 물론 게임-책까지 모든 것을 팔고 있으며 전 세계 2억명이 넘는 소비자들이 이 가게를 이용한다.

터치 스크린을 갖춘 스마트폰인 아이폰(2007년 출시)은 지금까지 수억개가 팔려나갔으며 진화를 계속하고 있는 중이다. 태블릿PC인 아이패드(2010년 출시)는 컴퓨터가 줄 수 있는 경험의 폭을 넓혀 놓았다. 애플의 시장 가치는 지난해 마이크로소프트를 추월한 데 이어 이제는 시가총액 부동의 1위 엑슨모빌과 선두를 다투고 있다.

인생의 정점에서 불꽃을 태우던 잡스가 마침내 무대를 내려오면서 두 거인의 경쟁 드라마는 아쉽게도 여기서 막을 내리게 됐다. PC냐,포스트 PC냐를 가리는 것은 다음 세대의 몫으로 남겨졌다.


◆ 스티브 잡스

△ 195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출생
△ 1972년 리드 칼리지 중퇴
△ 1976년 애플컴퓨터 창업,'애플1' 출시
△ 1984년 매킨토시 출시
△ 1985년 애플 CEO에서 물러나
△ 1997년 애플에 복귀
△ 2001년 아이팟 출시 · 아이튠 온라인 스토어 오픈
△ 2007년 아이폰 출시
△ 2010년 아이패드 출시
△ 2011년 애플 CEO 사임


◆ 빌 게이츠

△ 1955년 미국 시애틀 출생
△ 1975년 하버드대 중퇴
△ 1975년 마이크로소프트사 설립
△ 1984년 PC운영체제 윈도 첫선
△ 1990년 MS 오피스와 윈도3.0 출시
△ 1995년 윈도95 출시
△ 2000년 MS CEO 사임 · 새OS개발 전념
△ 2001년 윈도XP 출시
△ 2006년 윈도 비스타 출시
△ 2008년 MS에서 나와 자선사업가로 변신


이종천 IT칼럼니스트 jclee17@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