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달러화는 세계의 화폐다. 세계 외환거래의 85%에 달러가 사용된다. 국제 채권은 45%가량이 달러 표시물이다. 전 세계 외환보유액에서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도 60%를 웃돈다. 수출입을 포함해 미국을 거치지 않는 국제거래 또한 달러로 결제되는 게 보통이다. 100달러짜리 지폐의 75%는 미국 밖에서 유통된다고 한다.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지위는 그만큼 절대적이다. 실물경제에 대한 미국의 지배력은 약해져온 게 사실이다. 현재 전 세계 수출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13%에 불과하다. 해외 직접투자 비중도 20% 미만이다. 그런데도 달러의 지배력만큼은 여전한 것이다.

최근 이 달러 패권(覇權)에 금이 가는 일이 생겼다. 미국의 국가신용등급 강등이 현실화되면서다. 2차대전 이후 지속된 달러 패권 시대가 저무는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온다. 연방정부의 어마어마한 재정적자와 경쟁화폐의 도전이 겹치면서다. 미국이 달러를 통해 누려온 과도한 특권에 대한 비판도 불거지고 있다. 과연 달러 패권은 유지될 수 있을까. 새로운 기축통화의 등장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국제금융의 권위자이며 미 UC버클리 교수인 배리 아이켄그린은 《달러제국의 몰락》을 통해 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 그는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부상을 중심으로 세계 금융패권을 둘러싼 정치적 역학관계를 들여다봤다. 달러가 앞으로 세계 경제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할지,국제통화시스템은 어떻게 변할지에 대한 전망도 내놓는다.

그에 따르면 달러의 지위 상승은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달러의 지위는 1차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형편없었다. 벨기에 프랑보다도 쳐주지 않았다. 그러나 전후에는 파운드를 제치고 세계무대 전면에 등장했다. 연방준비은행의 출범과 환어음시장 활성화가 주효했다.

이미 1925년부터 파운드를 밀어냈다는 것이다. 이후 달러에 대한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금융위기 이후 사정은 달라졌다. 달러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 잘못된 재정관리와 금융체제에 대한 불만이 증가하면서다. 미국정부가 가계부문에서 키운 금융위기 위험을 간과했고,엄청난 재정적자와 대외부채를 발생시켰다는 비난이다.

그러나 그는 달러가 기축통화로서의 위상을 잃지는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유로나 위안도 달러를 대체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한다. 유로는 외환시장 거래의 37%,국제 채권 발행의 31%,외환보유액의 28%를 차지하는 통화다. 그러나 나라 없는 통화라는 게 걸림돌이다. 회원국의 이익에 반하는 조치를 취할 강제력이 없는 것도 그렇다.

위안은 좀 다르다. 중국의 외환보유액은 엄청나다. 3조달러가 넘는다. 이 중 65%가 달러다. 또 중국은 해외투자자들이 보유한 미 국채의 절반을 주무른다. 중국이 위안화의 위상을 높이려면 자본시장을 개방하고 풍부한 유동성을 공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은행대출과 고정환율제에 기반한 성장정책을 포기해야 하는 위험이 따른다. 경제규모도 그렇다. 그는 향후 10년간 매년 7%씩 성장해도 국내총생산이 미국의 절반 정도에 불과할 것이라고 진단한다. 결국 2020년이 돼도 달러보다 작은 도약대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유로 보유액이 유럽에 집중되듯이 위안 보유액은 아시아 지역에 한정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금본위제나 다른 상품본위제가 출현할 가능성도 일축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이 만든 국제준비자산인 특별인출권(SDR)은 더 가능성이 있지만 일상적인 국제통화로서 쓰일 가능성에는 회의적이라는 것이다. SDR이 추상적으로는 뛰어나지만 실질적으로는 쓰이기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는 달러가 경쟁통화들과 경주를 벌이고 있다는 생각의 근본 오류는 국제통화의 자리가 하나뿐이라는 믿음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복수 국제통화의 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전망한다.

"한 국가만 국제통화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한 깊이와 넓이를 지닌 금융시장을 가지라는 법은 없다. 20세기 후반에는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국제금융시장의 내재적 특성이 아니다. 복수의 국제통화가 공존하는 시대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 유로는 그것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 중국도 복수의 국제통화가 공존하는 시대를 추구한다. "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