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오늘도 그녀 옆자리에…"출퇴근 시간만 기다려요"
대기업에 근무하는 정 대리(32)는 요즘 아침 출근길이 즐겁기만 하다. 그에게는 '월요병'도 없다. 주말 저녁이 돼도 다음날 출근할 생각을 하면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돈다.

이유가 뭘까. 한 달 전 직장 통근버스를 탔다가 우연히 미모의 한 여직원을 발견했다. 시쳇말로 그녀를 보자마자 그대로 '필이 꽂혔다'.이후 통근버스 정거장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사람은 늘상 정 대리다. 버스에 1등으로 올라 타서는 평소 그녀가 즐겨 앉는 좌석 존(zone)에 자리를 잡는다. 180㎝가 넘는 장신을 이용해 옆자리까지 다리를 뻗고 앉는다.

'만사는 불여튼튼.' 다리를 걸쳐 놓는 것만으로 불안해 옆자리에 가방까지 두고,앉을 땐 꼭 복도 쪽을 택한다. 그러다 그녀가 주변으로 오면 잽싸게 가방을 안고서는 창가 쪽으로 옮긴다. 그녀가 옆자리에 앉을 때 밀려오는 성취감이란….정 대리의 심장은 터질 것만 같다.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 '앗싸~'가 터져나오는 것을 꾹 참아야 한다.

통근버스. 김과장 · 이대리들의 '제2의 사무실'이다. 정 대리처럼 풋풋한 연애 감정이 싹트는 곳이지만 꼭 즐거운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출퇴근길 통근버스 풍경을 살펴본다.

◆통근버스 안에서의 '변신'

여직원들에게 통근버스는 파우더룸이기도 하다. 유통업체 여직원 윤모씨는 통근버스 자리에 앉을 때까지는 늘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아침잠이 많은 그는 집에서 간단히 세수만 하고 나온 '생얼'을 남들에게 보여 주기 싫어서다.

버스 뒷자리에 앉으면 본격적인 변신 작업이 시작된다. 손거울을 들고 BB크림,프레스파우더에 이어 아이브로 펜슬로 눈썹을 공들여 그린 후 본격적으로 눈 화장에 들어간다. 세심한 터치가 중요한 아이라인은 버스가 신호대기로 멈췄을 때를 이용해 신속하게 처리하는 센스 정도는 기본.살구색 볼터치에 이어 끝으로 립스틱까지.이렇게 30분 정도 지나야 비로소 윤씨의 얼굴에 자신감이 돈다. 옆자리 김 과장의 한마디."솔직히 옆에서 부스럭대는 통에 그 귀한 쪽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남들 앞에서 화장하는 것,그것 좀 '진상'아닌가요. 대학 시절 깔끔하게 화장하고 아침 6시에 도서관에서 시험공부하던 여대생들이 새삼 존경스럽네요. "

◆통근버스는 '제2의 사무실'

전자기업의 김모 차장(42)은 평소에 자가용으로 출퇴근한다. 하지만 폭설 · 폭우가 올 때는 항상 직장 통근버스를 이용한다. 직장 통근버스를 타면 아무리 회사에 늦게 도착해도 지각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통근버스에 올라탄 순간 이미 출근으로 인정해 주기 때문이다. "지각 걱정이 없는 데다 눈비가 오면 출근 시간도 많이 걸려 버스 안에서 잠을 청할 수 있어 일석이조죠."

그러나 직장 통근버스가 항상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니다. 인천에 위치한 한 공기업에서 근무하는 김모씨(여 · 27)는 통근버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갈아타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 지하철을 이용할 때가 많다. 특히 야근하고 늦은 시간에 퇴근할 때는 '안전하고 편리해 보이는' 통근버스 대신 무조건 지하철을 이용한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역겨운 기억 때문이다. "밤에 통근버스를 타면 회사 부근에서 한잔 한 사람들이 풍기는 소주와 삼겹살 악취가 가득해요. 한번은 옆자리에 술을 많이 먹은 직원이 탔다가 먹은 걸 모두 토해 저도 낭패를 봤어요. 그 후론 절대로 밤에 통근버스를 안 타요. "

통근버스에서 직장 상사들과 마주치는 경우가 많다는 점도 김과장 이대리들에겐 스트레스다. 자동차 회사에 다니는 문 대리(33)는 직장 상사 때문에 통근버스 이용을 피한다. 문 대리는 그룹장과 같은 동네에 살기 때문에 통근버스를 타면 출퇴근 시 그를 자주 만나게 된다. 문제는 그룹장이 문 대리를 일부러 옆에 앉힌 후 내릴 때까지 업무 얘기만 늘어놓는다는 것.

특히 피곤한 퇴근길 눈도 못 붙이고,그룹장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은 '왕짜증'이다. "그룹장의 잔소리를 출퇴근 때 듣느니 불편하더라도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걸 선택했어요. 통근버스에서만큼은 업무 걱정 없이 푹 쉬어야 되는 것 아니에요?"

◆중소기업 "배부른 소리"

직장 통근버스의 희로애락(喜怒哀樂)도 중소기업 직원들에겐 남 얘기일 뿐이다. 경기도 기흥의 중소기업 공단에서 근무하는 안모 과장(35)은 출퇴근 때문에 이직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 집이 서울인 안 과장은 출퇴근 시 자가용을 이용하는데 한 달 기름값이 30만원 이상 든다. 기름값을 아끼고자 지하철을 이용하면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치여 출근도 하기 전에 힘이 빠져 버린다. 그는 "회사에서 비용이 조금 들더라도 통근버스를 마련해준다면 출퇴근 고민 때문에 이직하는 직원들이 훨씬 줄어들 것"이라고 푸념했다.

현행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시행령'에 따르면 기업의 통근용 전세버스는 자사 직원들만을 대상으로 운행할 수 있다. 결국 대기업 위주로만 직장 통근버스 운영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도시 외곽에 위치해 접근성이 떨어지는 산업단지에 입주한 중소기업들은 통근버스 필요성이 더 절박하나,이런 법 규정과 비용 때문에 사원들에게 통근버스를 제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중소기업 직원들에게 희소식이 있다. 국토해양부는 오는 9월부터 산업단지에 입주한 중소기업 직원들을 위해 여러 회사 직원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는 통근버스 운행이 가능하도록 법을 개정할 방침이다.

강경민/조재희/윤성민/노경목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