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꼭 칼퇴해야 되는데….' 오후 6시21분,김 대리는 팀장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카카오톡으로 인물까지 '검증'한 '그녀'와 소개팅이 잡혀 있는 날.그러나 5분 뒤 6시26분,팀장은 한껏 들떠있는 그에게 서류 하나를 내민다. "내일 아침까지 보고서 만들어 놔." 팀장은 이렇게 멘트 하나 툭 날려 놓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김 대리는 오늘도 야근이다. 솔로 탈출의 길은 이렇게 한 발 더 멀어졌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김과장,이대리들의 눈가엔 다크서클이 사라질 날이 없다. 한국 직장인의 연간 평균 근로시간은 2256시간.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를 차지했다는 데 자부심을 느껴야 하는 걸까. 한국은 여전히 '야근 권하는 사회'다.

◆팀장님 제발 먼저 퇴근해주세요

야근의 대부분은 눈치 없는 팀장 때문에 생긴다. 팀장이 "자 퇴근합시다"라고 하면 직원들은 "내일 보고가 있어서…" 또는 "자료가 안 와서…"라며 말끝을 흐린다. 팀장보다 먼저 퇴근하는 것에 눈치가 보여서다. 그러면 공명심이 발동한 팀장은 "그래? 다들 남는데 나도 밀린 기획안이나 다듬어볼까?"라며 자리에 앉는다. 직원들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한다.

화학 업체에 근무하는 이모 대리는 '무늬만 야근'을 하는 팀장이 지긋지긋하다. 고3 수험생 딸을 둔 팀장은 7시 무렵 법인카드로 저녁을 먹고,인터넷 바둑을 하거나 신문 · TV 뉴스 등을 보며 시간을 때운다. 딸의 학원이 끝나는 10시가 되면 퇴근길에 오른다.

이 대리는 "본인은 회사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으로 포장하고 정시에 퇴근하는 직원들은 자기일밖에 모른다고 흉을 본다"며 "차라리 빨리 가서 방해나 안 했으면 좋겠다"고 푸념했다.

◆야근 좌표를 찍어라

야근할 때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좌표찍기'다. '티 내는 야근 전문가' 최모 대리는 밤 늦게 서류 작업을 마치면 반드시 회사 이메일로 팀장에게 보고서를 올린다. 본인이 그 시간까지 회사에 남아 일을 했다는 결정적 증거이자,팀장이 사전에 내용을 검토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다.

서울 종각 인근의 회사에 다니는 장모 대리는 의도치 않게 야근을 전국에 알리기도 했다. 작년 12월31일 야근 중 창가에 서서 보신각 타종을 구경했는데 13층에 홀로 서 있는 장 대리의 모습이 TV화면에 비쳐진 것.그는 "한 해 마지막날까지 야근을 하냐는 문자를 많이 받았다"고 전했다.

교육 업체 직원 문모씨는 1주일에 세 번 대학원 수업을 듣는데,오후 9시에 수업이 끝나면 바로 회사에 복귀한다. 오후 10시까지 근무하면 다음날 오전 10시에 출근할 수 있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사정 모르는 상사가 "책임감이 강하다"고 칭찬하지만,솔직히 속으로는 머쓱한 마음이 든다.

◆유럽 축구 보려고 야근해요

게임업체에 다니는 이모 대리는 사내에서 '오후반'으로 통한다. 거의 매일 밤샘 야근을 하고 다음날 점심 때 출근한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하지만 그가 야근하는 진짜 이유는 유럽 축구리그 때문이다.

이 대리는 영국 프리미어리그를 비롯해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이탈리아 세리에A 등을 매일 챙겨본다. 하지만 아내가 새벽까지 TV 보는 것을 싫어하다보니 회사에서 야근 삼아 일하면서 축구를 보다 귀가한다. "유럽축구 시즌이 끝나고 새 시즌에 돌입하기 전까지인 6월에서 8월까지는 축구 선수들처럼 저도 야근 휴식기에 들어갑니다. "

◆야근 수당 백태

식품업체 직원 오 과장은 인터넷 문학동호회 카페 회원이다. 우연히 번개모임에 나갔다가 울화가 치미는 경험을 했다. 밤 9시가 되자 모임을 주관한 사람이 갑자기 자리를 비웠다. 모임 장소 인근 공기업에 다니는 그는 야근비(OT비, overtime費)를 탈 요량으로 야근카드를 체크하고 왔다. 술자리에 돌아온 그가 '공정한 사회'와 '우리 아이들을 위한 노력'을 강조하는 순간마다 부글부글 끊던 오 과장은 폭탄주를 거푸 마시다가 결국 뻗고 말았다.

야근 식대를 개인적인 용도로 쓰는 악덕 부장들도 있다. 한 대기업에서는 매달 1인당 6000원씩 야근 식대를 산정해 각 부서에 할당한다. 이 돈을 모으면 전 부서원이 가끔 삼겹살을 구울 수 있다. 그러나 박모 대리가 속한 팀에서 야근 식대는 모두 부장 차지다.

박 대리는 "부장은 일부러 매달 초 식권을 잔뜩 사서 비치해놓고 직원들은 식당만 가게 한 뒤 남은 돈은 접대 운운하며 본인의 활동비로 쓴다"며 "야근하는 것도 서러운데 밥도 마음대로 못 먹게 한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저 바람 피우는 거 아닙니다"

광고회사에 근무하는 박모 과장은 야근 때문에 이혼을 당할 뻔했다. 광고주 프레젠테이션을 일주일 앞둔 박 과장은 어김 없이 야근 체제에 돌입했다. 회사와 집까지 1시간30분가량 걸리는 그는 3일간 회사 인근 찜질방에서 잠을 자면서 PT 준비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11시께 핸드폰을 자리에 두고 화장실을 간 사이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려대자 친절한 막내 여직원이 핸드폰을 대신 받아 줬다. 그러자 박 과장의 부인은 "야 너 누구야?"라며 다짜고짜 따져 들기 시작했다. 박 과장의 부인은 막내 여직원을 남편과 함께 불륜의 밀월 여행을 떠난 내연녀로 오해한 것.

박 과장의 한마디."후배가 잘 대답해서 오해가 겨우 풀렸지만,직업이 오죽하면 그랬겠습니까. "

강유현/고경봉/조재희 기자 yh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