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 매니지먼트] 인물 탐구 - 최병오 패션그룹형지 회장
배짱·친절이 '밑천'
거래처 뚫을 땐 남다른 추진력, 손님엔 고분고분…단골 만들어


돈 벌려면 옷장사 하라
동대문 입성 후 여성복 히트…크로커다일 만나며 대박 행진


역발상 전략
서울 아닌 외곽에 첫 점포…싼 가격에 백화점 품질로 어필


매출 1조보다 더 중요한 목표
옷 입는 스트레스 풀어줄 저렴한 아웃도어 선보일 것


"자,이쪽으로 오세요. 여기가 '크로커다일 레이디'의 한국 본부입니다. "

1997년 서울 동대문 광장시장.외국인 노신사가 40대 중반 한국인의 손에 이끌려 시장건물 지하 2층으로 내려갔다. 목적지는 건물 한쪽에 들어선 33㎡(10평)짜리 사무실.노신사의 표정이 일순 바뀌었다. '겨우 이 정도 회사였냐'는 실망감 때문이었다. 노신사는 싱가포르 패션 브랜드 크로커다일의 오너인 탄 한신 회장.한 해 전 한국 딜러를 통해 5000만원에 '크로커다일 레이디'의 한국 라이선스를 따낸 최병오 패션그룹형지 회장(58)을 만나기 위해 방한한 터였다.

탄 회장의 실망한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최 회장은 설명을 이어나갔다. "한국에는 중년 여성들이 편하게 입을 만한 옷이 없어요. 백화점 브랜드는 너무 비싸고,시장 제품은 디자인이나 품질이 떨어지고….크로커다일을 '백화점 품질'에 '시장 가격'으로 내놓으면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제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합니다. "

일그러졌던 탄 회장의 얼굴이 환해지더니 최 회장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본사 오너로부터 인정을 받은 순간이었다. 탄력을 받은 최 회장은 남다른 추진력을 앞세워 '아줌마 패션'을 만들어나갔다. 그러기를 15년.한때 페인트 대리점과 빵집을 운영하던 '동대문 장사꾼'은 이제 연매출 8000억원(올해 예상 판매가 기준)의 패션업체를 이끄는 '신데렐라 스토리'의 주인공이 됐다.

◆"장사는 나의 천직"

[CEO & 매니지먼트] 인물 탐구 - 최병오 패션그룹형지 회장
최 회장은 부산 하단동 출신이다. 횟가루 공장을 운영하는 '사장님' 집에서 태어난 덕분에 넉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첫 번째 시련은 중학교 1학년 때 찾아왔다. 아버지가 간암으로 타계한 것.가세는 빠른 속도로 기울었다. 최 회장이 공부와 담을 쌓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상실감에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친구들과 몰려다녔다. 당시 그의 별명은 '최배짱'.키는 작았지만 배짱이 있는 데다 '싸움 실력'도 대단했기 때문에 누구도 그를 쉽게 보지 못했다.

공부를 소홀히 한 대가는 컸다. 부산해양고 입시에 낙방하면서 '마도로스가 되겠다'는 오랜 꿈을 접어야 했다. 부산고등기술학교 전자과에 입학했지만,정을 붙이지는 못했다.

돌파구는 막내 삼촌이 마련해줬다. 부산 국제시장에서 페인트 대리점을 운영하던 삼촌이 1970년대 초 갓 고교를 졸업한 최 회장에게 "가게 일을 좀 거들어 달라"고 요청한 것.장사는 그와 궁합이 맞았다. 사람을 만나고 물건을 파는 게 그에겐 신나는 일이었다. 이듬해 막내 삼촌이 세상을 떠나자 대리점을 아예 인수해버렸다.

최 회장의 '장사 밑천'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배짱'과 어머니가 넘겨준 '친절함'이었다. 손님을 맞이하거나 자전거로 페인트를 배달할 때는 친절함을,거래처를 뚫거나 가격 협상을 벌일 때는 배짱을 무기로 내세웠다.

잘나가던 사업은 무리한 도전으로 인해 무너지게 됐다. 그도 방수페인트 제조업에 뛰어들었지만,특허를 취득하는 데 실패하면서 빚만 지게 됐다. 1979년 페인트 사업을 접은 그는 무작정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성공과 부도 그리고 재기

동대문에서 원단가게를 운영하던 손위 동서는 최 회장의 사업수완이 뛰어나다는 걸 단번에 읽었다. 1980년 그에게 맡긴 제과점이 성공을 거두자 2년 뒤 "돈 벌려면 옷장사를 하라"며 동대문 입성을 주선했다.

최 회장은 '바다상가'에 3.3㎡(1평)짜리 매장을 얻었다. 첫 아이템은 여성 바지였다. 하지만 신설 상가였던 탓에 찾아오는 소매상이 거의 없었다. 그는 새벽 4시께 출근해 점심 전까지 일을 마친 뒤 바지를 30~40개씩 어깨에 걸치고 전국 대형 공판장을 훑었다. 찾아오는 소매상만 맞이하던 다른 도매상들과 달리 직접 고객을 찾아나선 것이었다. 문전박대하던 소매상들도 "매대에 한번만 올려 달라"는 그의 부탁을 언제까지나 외면할 수는 없었다. 가격 대비 품질이 좋았던 그의 제품은 좋은 반응을 얻었다.

최 회장의 도전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당시에는 드물게 '동대문 옷'에 '크라운'이란 브랜드를 붙인 것.크라운 바지는 히트를 쳤다. 최 회장은 "1980년대 중 · 후반에는 '크라운 바지가 없는 사람은 대한민국 여자가 아니다'란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옷 만들고 파는 데는 '귀신'이었지만 그때만 해도 숫자에는 '젬병'이었다. 게다가 '도와달라'는 요청을 뿌리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이게 화근이 됐다. 돈을 빌려간 지인들이 제때 입금을 하지 않는 일이 반복되자 결국 그가 발행한 어음이 부도처리됐다. 40세가 되던 1993년 그는 다시 무일푼으로 돌아갔다. 161㎡(49평)짜리 아파트와 자가용을 팔아 빚을 갚았다. 69㎡(21평) 월세로 옮기면서 자녀 과외마저 끊어야 했다. 그에게 남은 건 현금 4000만원과 '옷 만드는 재주'뿐이었다.

[CEO & 매니지먼트] 인물 탐구 - 최병오 패션그룹형지 회장
'재기작'은 남성복 브랜드 '비버리힐스 폴로클럽'.최 회장은 2000만원을 주고 1년짜리 여성복 라이선스를 취득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1년여 만에 수억원을 거머쥐게 됐다. 하지만 본사가 계약 연장을 거부한 탓에 최 회장은 또다시 새로운 브랜드를 찾아 헤매는 신세가 됐다.

'악어'가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이때였다. 국내에 먼저 들어온 '크로커다일 맨'을 보고,"저 브랜드로 여성복을 만들면 되겠다"고 생각한 것.최 회장은 '역발상' 전략을 구사했다. 거의 모든 패션업체들이 첫 점포를 서울 중심 상권에 내는 것과 달리 경기도 시흥 외곽에 1호점을 냈다. 반면 광고모델로는 배우 오연수 · 송윤아 씨 등 스타급을 기용했다. '저렴하지만 스타일만큼은 백화점 브랜드에 안 떨어진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매장 직원들로 하여금 고객들에게 옷을 맵시있게 입는 법을 알려주도록 한 것도 주효했다. 백화점에서나 접하던 '코디 서비스'를 받은 아줌마들은 크로커다일에 열광했다.

◆도전은 계속된다

패션그룹형지에는 크로커다일 레이디 외에 샤트렌,올리비아하슬러,라젤로,아날도바시니,CMT,와일드로즈 등 6개 브랜드가 더 있다. 이 중 최 회장이 요즘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30~40대 여성복 브랜드인 샤트렌이다. 해외 브랜드인 크로커다일과 달리 형지가 자체 보유한 브랜드다. 연내 국내 증시에 샤트렌을 상장한 뒤 중국 등 해외시장 공략의 첨병으로 삼는다는 구상이다. 지난 2월 한국의류산업협회장으로 선임된 만큼 국내 섬유패션 산업 발전에도 기여하겠다는 포부다.

그에게 다음 목표를 물었더니 이런 답을 내놓았다. "내년까지 1조원 매출을 달성하고,2015년까지 3조원으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워 놓긴 했는데….더 중요한 목표는 따로 있어요. '국민들을 옷 입는 스트레스에서 해소시켜 주자'는 겁니다. 크로커다일 덕분에 아줌마들이 큰돈 들이지 않고 멋쟁이로 변신했잖아요. 요즘 아웃도어 제품이 비싸다는 얘기들 많이 하죠?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내년쯤 크로커다일처럼 '가격 거품 없는' 아웃도어 브랜드를 선보일 겁니다. "

오상헌/민지혜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