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젤리제엔,샹젤리제엔/ 맑은 날이건,궂은 날이건/ 낮이건,밤이건/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이 있다오.'

다니엘 비달의 샹송 '르 샹젤리제'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로 꼽히는 샹젤리제의 매력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샹젤리제는 파리지앵이 가장 즐겨 찾는 서울의 명동과 같은 곳이다. 샹젤리제가 늘 사람들로 붐비는 이유는 대체 뭘까. 무엇보다도 이곳에 가면 세계 최고의 명품 부티크를 만날 수 있다. 루이비통 위고보스 란셀 베네통 자라 까르띠에 나이키 라코스테 등 누구든 이름만 들으면 알 만큼 유명한 패션 명품 숍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또 부근에는 대통령 관저인 엘리제궁과 기획전시관으로 유명한 그랑 팔레와 프티 팔레 미술관이 자리하고 있어 이 거리의 품격을 한층 높여준다.

이곳과 연결되는 메트로와 고속전철(RER) 노선이 증가한 이후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치고 있다. 예전의 고급스럽고 우아한 이미지가 점점 퇴색하고 있는 것이다. 유동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대중적인 기호를 만족시키기 위한 기성복 매장이라든가 패스트푸드점이 속속 이곳에 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리시가 뒤늦게 이 명품 거리의 이미지를 사수하기 위해 대중적 점포의 유입을 막으려 했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덕분에 임대료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이곳은 뉴욕의 5번가,런던의 본드 스트리트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임대료가 비싼 곳으로 통한다. 몇몇 영화관은 관객 수가 늘었는데도 불구하고 문을 닫아야 했다. 입장수익 증가가 임대료 상승 속도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던 것이다.

샹젤리제가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이 황제에 등극해 파리시를 대대적으로 정비한 제2제정 시대(1852~1870)였다. 오스망 남작의 주도 아래 종전의 구불구불한 파리의 골목길은 직선로로 바뀌고 4차선 이상의 대로들이 사방으로 기세 좋게 뻗어나갔다. 소형의 돔과 장식성이 가미된 바로크풍의 건물들도 곳곳에 건설돼 파리의 겉모습을 크게 바꿔 놓았다.

오스망 스타일의 건물들이 샹젤리제 거리에 들어선 것도 이 때였다. 이런 근대적 도시 풍경은 중산층의 레저 활동과 함께 인상주의 화가들의 주목의 대상이 됐다. 카미유 피사로,에드가 드가,르누아르,장 베로,귀스타브 카유보트는 파리 시민들의 일상을 즐겨 화폭에 담았다. 미국 출신의 차일드 하삼(1859~1935)도 그런 화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미국에서 이미 촉망받는 신인으로 인정받은 하삼은 1886년 파리에 유학,아카데미 쥘리앙에서 회화 수업을 받았는데 그곳의 보수적인 교육 태도에 크게 실망했다. 그는 몽마르트르 지구에 아틀리에를 마련한 후 파리 곳곳을 걸어 마음에 드는 앵글을 그때그때 스케치북에 담아 작업의 기초로 삼았다.

하삼은 미국에 있을 때 이미 인상파 미국 순회 전시를 접함으로써 이 진보적인 화가들의 새로운 시도에 공감하고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그가 인상주의자들처럼 빛의 효과를 뚜렷이 인식하고 색채를 주관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 땅에 발을 딛고 나서였다. 파리에서 인상주의자들과 전혀 교류하지 않았던 그가 인상주의 경향의 그림을 그렸던 것으로 보아 그는 새로운 경향의 그림들을 전시회를 통해 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파리 샹젤리제,4월의 비'는 그러한 인상주의자들의 회화 원리를 충실히 따른 작품 중 하나다. 그림 속 풍경은 봄비가 내리는 샹젤리제 거리의 러시아워를 묘사한 것이다. 거리에는 많은 마차들이 좌우로 바쁘게 갈 길을 재촉하고 있다. 오른쪽에 보이는 두 필의 흰 말이 끄는 마차는 여객 수송용으로 지붕 위에까지 손님을 가득 싣고 있다. 손님들이 쓴 검은색 우산과 백마의 흰색이 큰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 뒤에 따라오는 마차와 검은색 말들은 거친 붓질로 대충대충 그려져 있어 인상주의자들의 터치를 연상케 한다. 길바닥의 흠뻑 고인 물에 반사된 마차의 실루엣은 이런 묘사를 즐겼던 피사로의 파리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거리 좌우에는 마침 마로니에가 하얀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어 봄기운이 무르익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왼편 가로수 위로는 건물 지붕들이 고개를 쳐들고 있어 그곳이 개선문이 자리한 샤를 드골 에투알 광장 쪽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왼편에는 우산을 쓴 여인이 이 북적거리는 거리 풍경을 한가로이 바라보고 있다. 그녀가 쓴 우산이 거의 젖혀져 있는 점으로 보아 비는 내렸다 그쳤다 오락가락하고 있는 모양이다. 여인은 아마도 다니엘 비달의 노랫말대로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샹젤리제에서 자신의 희망을 성큼 다가온 봄의 여신에게 속삭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석범 < 미술사학 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