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공흥리.김선태씨(52) 부부는 얼마 전 노모를 모시고 서울에서 이사왔다. 삼부토건에 다녔던 김씨는 퇴직 후 이곳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다. 고향은 충남 논산이지만 노모조차 고향이 아닌 서울 근교를 고집했다. 김씨는 "직장을 다니는 남동생과 여동생은 여전히 서울에서 살고 있다"며 "주말이면 가족들이 한데 모여 전원 생활을 즐길 수 있어서 좋다"고 흡족해 했다.

양평군 청운면 갈운리에 살고 있는 신모씨(72 · 여)도 마찬가지다.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피아노 학원을 운영했던 그는 은퇴 주거지로 양평을 택했다. 서울과 가깝다는 게 이유였다. 신씨는 "서울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고향에 대한 미련이 별로 없다"며 "병원과 문화 공연장 등 편의시설을 이용하기 편리하고 친구나 동료도 쉽게 만날 수 있어 서울 근처로 왔다"고 말했다.


◆경제력 있는 은퇴계층 뉴실버세대

'뉴실버세대'의 등장으로 한국인의 은퇴지도가 바뀌고 있다. 은퇴자들의 주거지뿐만 아니라 관련 산업 전반에 새로운 변화가 일고 있다. 뉴실버세대는 새로운 가치관과 경제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 '실버세대'와 다르다.

이들은 60세가 넘어도 여전히 팔팔하다. 경제력도 있다. 뉴실버세대는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시작하고 싶어한다. 자식에게 얹혀 사는 뒷방 늙은이는 사절이다. 돈을 쓸 만큼 쓰고 재산은 스스로의 노후를 위해 쓰고 싶어한다. 돈을 벌어도 최대한 아껴 쓰고 모은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겠다는 기존 실버세대와는 생각 자체가 다르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삶에 책임지겠다는 태도가 강하다. 삶을 적극적으로 즐기려는 것도 이들의 특징이다.

뉴실버세대는 주로 은퇴 단계에 진입한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 내 중산층 그룹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들은 안정적인 경제력과 소비력을 보유하고 다양한 소비 경험과 노하우를 지닌 합리적 소비자다. 이전 세대들이 예금 위주 금융상품에 의존한 것과 달리 펀드 보험 채권 파생상품 등 다양한 금융상품을 경험해 봤고 재테크에도 관심이 많다. 또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으며 적극적으로 자신을 가꾸고 스스로에게 투자한다. 운동 여행 레저 등 건강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활동도 원한다.

◆주거 트렌드가 바뀐다

이들 뉴실버세대는 우선 은퇴자들의 주거 트렌드를 바꾸고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 붐을 이뤘던 지방이나 농촌,고향으로의 이주는 시들해졌다. 아무런 연고는 없지만 서울과 가까운 곳에 터전을 잡는다. 삼성생명 FP센터가 2009년 서울에 살던 60세 이상 전출자가 전입해간 곳을 조사한 결과 경기도로 옮겨간 사람은 전체 1만2984명 중 1만1230명으로 86.5%에 달했다. 강원도 원주 등 서울에서 2시간 이내에 위치한 곳까지 포함하면 비중이 90.5%에 이른다.

이에 따라 최근 경기도 양평 가평 여주,강원도 원주 홍천 횡성 등 서울 근교에 '은퇴자 주거 벨트'가 형성되고 있다. 경기 충북 강원 등 3개 도의 경계(境界) 지역인 원주시 부론면의 경우 10년 전부터 은퇴자가 몰려들기 시작해 현재 100세대가 넘는 은퇴자들이 살고 있다.

우재룡 삼성생명 은퇴연구소장은 "과거 은퇴자들은 연고가 있는 고향이나 생활비가 적게 드는 지방으로 옮겨가는 비중이 절반을 넘었지만 최근에는 생활비는 조금 더 들더라도 교통이 편리하고 병원 문화 공연장 등 기반시설을 이용하기 편리한 도시 근교 지역이 은퇴 주거지로 급부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산업 지형도 변화

구매력을 가진 뉴실버세대는 산업 지형도 변화시키고 있다. '구몬'이나 '빨간펜'으로 알려진 학습지회사 교원그룹은 보유한 방문교사 인력을 활용해 노인 방문 돌봄서비스 사업(방문개호 사업)에 진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기존 사업과 시너지 효과가 날 뿐만 아니라 저출산으로 줄어드는 학령기 아동 수요층을 고령화로 늘어나는 뉴실버세대로 대체하는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교원그룹은 뉴실버세대를 겨냥한 실버산업을 '10년 후 그룹을 먹여 살릴 신수종 사업'으로 보고 있다.

뉴실버세대가 주도적 소비계층으로 부상하면서 이들의 자산 등을 관리해주는 보험업과 컨설팅사업도 활황세다. 퇴직연금이 활성화하면서 계리사 등 관련 전문가 수요도 급증하고 있다.

유산 상속과 유언장 작성 등에서 법적 도움을 필요로 하는 뉴실버세대가 늘면서 변호사,변리사를 찾는 이들도 많아졌고 '안락한 죽음'을 위한 호스피탈리티 기관도 늘어나고 있다.

정호승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일본에서도 고령화가 급속히 진전되면서 이들을 겨냥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대거 쏟아졌다"면서 "국내 기업들도 이제 뉴실버세대의 수요에 맞는 상품과 서비스 개발을 준비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금융회사도 맞춤형 상품 · 서비스 개발을

뉴실버세대의 가장 큰 특징은 구매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따라서 금융회사들도 이들의 수요에 부응할 수 있는 맞춤형 금융상품과 서비스를 개발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우리나라보다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앞선 미국이나 일본 금융회사들은 이미 발빠르게 대처해 왔다. 미국 금융회사들은 2005년 은퇴 준비를 위한 재무계획 서비스를 선보였다. 은퇴자금 계산,은퇴 교육,개인퇴직계좌(IRA) 세제 혜택 안내 등을 해주는 전용상담 데스크를 두고 있다. 역모기지론,연금간병 특약 등 다양한 연금상품도 마련했다.

일본 금융회사들은 2004년부터 '단카이세대'(1947~1949년에 태어난 전후 베이비붐 세대)를 새로운 부유층으로 규정하고 전용 자산운용 상담 점포와 전담 자회사를 운용하고 있다. 미즈호은행은 '제2의 출발 응원플랜',미쓰비시UFJ증권은 '단카이클럽' 등 단카이 세대를 대상으로 다양한 회원제 서비스를 도입했다. 니혼생명의 전문의 소개 서비스,야마토생명의 손자 용돈 지급 보험 등 맞춤형 상품도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도 뉴실버세대를 위한 마케팅을 시작하는 단계라며 앞으로 더욱 적극적으로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년층을 위한 건강 여행 레저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고 대학과 연계해 주 4시간 수업만 들으면 되는 미니대학 진학이나 사람 냄새를 느낄 수 있는 커뮤니티 형성 등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노년층을 위해 상품 설명 자료를 큰 글씨와 이미지 위주로 하고 인터넷뱅킹이나 스마트폰뱅킹도 메인화면 위주로 단순하게 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강동균 기자 kd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