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 청천동 와이지원.공장 안에 들어서면 빼곡히 배치된 기계들로부터 금속가공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린다. 대당 2억원이 넘는 고가기계들이다. 이곳이 전 세계로 수출되는 절삭공구(Cutting tool)를 만드는 심장부다. 이 회사는 국내외에 모두 14개 공장을 두고 있다. 이 중 국내는 인천 안산 광주 충주 4곳에,해외는 미국 중국 인도 독일 일본 등 7개국에 10개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연간 수출액은 1억달러가 넘는다.

독일에만도 연간 3000만달러 이상 수출한다. 독일은 어느 나라보다 기계 분야의 자존심이 강한 나라 아닌가. 그런데 독일인들이 앞다퉈 와이지원의 딜러로 나서고 있다. 독일 전역에 산재해 있는 대리점은 한국 동포가 아닌,현지인이 운영하는 업체들이다.

이 회사가 만드는 제품은 쇠를 깎는 절삭공구다. 좀 더 구체적으론 엔드밀 드릴 탭 등이다. 만약 절삭공구가 없으면 항공기 자동차 전자제품 플라스틱 산업이 멈춰선다. 항공기 엔진의 프로펠러를 비롯해 동체,각종 무기,자동차부품을 깎거나 전자부품,플라스틱제품용 금형을 만드는 데 쓰이는 게 바로 절삭공구이기 때문이다. 송호근 대표는 "비행기 동체의 경우 70% 이상 깎아서 만들기 때문에 절삭공구가 필수품"이라고 설명한다.

이 중 엔드밀은 금속 표면을 깎는 공구다. 금형,자동차산업,전자기기,의학,광학,항공우주산업의 부품을 정밀 가공하는 데 쓰인다. 드릴은 금형,공작기계부품,자동차부품,전자부품에 구멍을 뚫는 공구다. 탭은 나사를 가공하는 데 사용된다. 이들은 초경합금으로 만들어진다. 금속 중에서 가장 단단한 다이아몬드 다음으로 강한 재질이다. 그래야 금속을 가공할 수 있다.

이 회사가 절삭공구 강자로 올라서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글로벌화다. 송 대표는 창업 초기부터 국내시장보다 해외시장에 주력했다. 서울대 공대를 나와 말표 고무신을 만들던 ㈜태화의 자회사인 태화기계에 입사한 송 대표는 이곳에서 엔드밀 국산화를 추진했으나 기술제휴선의 기술제공 거부로 국산화에 실패했다. 이를 계기로 독립하기로 결심했다. 자신이 직접 만들어보기로 한 것이다. 우선 1981년 말 집을 주소로 사업자등록증을 냈다. 이듬해인 1982년 10월 직원 14명으로 부평에서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사명은 양지원공구였다.

처음부터 해외시장을 겨냥했다. 내수시장을 뚫으려면 줄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에는 재주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아이템 중 한 가지에서 1등을 하면 희망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 전략이 맞아떨어져 수출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첫해인 1983년 25만달러를 수출할 수 있었다.

글로벌화를 위해선 무엇보다 판매와 생산거점이 필요했다. 창업 직후부터 해외 사무소와 공장 구축에 나섰다. 시카고에 미국사무소를 설치했다. 이어 순차적으로 사무소와 공장 설립에 나서 지금은 인도 중국 등에 해외 생산법인을 두고 있다. 영국 독일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폴란드 루마니아 호주 싱가포르 중국 등 17개국에는 17개 판매법인(지사)을 운영하고 있다. 송 대표는 "어차피 절삭공구는 시장이 큰 해외에서 승부를 걸 수밖에 없어 처음부터 글로벌화에 나섰다"고 밝힌다. 그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해외출장도 주로 주말에 출발하며 월요일부터 바로 상담에 들어간다.

둘째,품질이다. 공구는 설비 재료 가공기술 등이 종합적으로 어우러져야 고급 제품이 탄생한다. 와이지원은 돈을 버는 대로 고급설비에 투자했다. 이에 따라 정밀도가 우수한 다축CNC 장비를 많이 갖추고 있다. 30년 동안 쌓은 연삭기술과 60여명에 이르는 국내외 연구개발인력이 큰 힘이 된 것은 물론이다. 송 대표는 "우리 회사 임직원은 독일의 DIN 규격,일본의 JIS 규격,미국의 ANSI 규격보다 더 엄격한 자체 검사기준을 통해 품질 수준을 지킨다는 자존심을 갖고 있다"고 밝힌다. 그 바탕에는 장인정신이 녹아 있다.

셋째,스피드 경영이다. 그는 비서가 있지만 손님이 오면 믹스 커피를 직접 타준다. 그게 더 빠르기 때문이다. 직원들도 부장 임원을 통해 보고하는 게 아니라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통해 수시로 보고한다. 그는 1년에 150~200일 정도 해외를 다닌다. 연평균 출장 횟수는 40~50회에 이른다. 하지만 출장 중에도 인터넷을 통해 리얼타임으로 각종 보고를 받고 즉석에서 결정을 내려준다. 그래야 지체없이 일이 추진되기 때문이다.

기자가 인터뷰하는 도중 송 대표는 자신의 이메일을 열어 보여준다. 그 안에는 수십건의 업무보고가 들어 있다. 단순히 결재만을 위한 보고가 아니다. 일의 추진상황도 올라온다. 자신이 결정할 것은 즉각 결정해 리턴메일로 보낸다. 동시에 관련 임원 및 부서장에게 참조하라고 보내준다. 많은 사람이 서로 얼굴을 보지 않고도 일의 처리과정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송 대표는 "우리 회사에서 결재받기 위해 기다리거나 다음 날 다시 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고 덧붙인다.

그는 "몇 년 전 브라질에 출장갔을 땐 마침 호텔에 인터넷이 연결돼 있지 않아 2시간 동안 인터넷망이 연결된 컴퓨터를 찾으러 다니느라 헤맨 적이 있다"며 "하지만 인터넷이 연결된 곳에선 밤낮 없이 업무를 처리한다"고 설명한다.

와이지원은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수주가 줄면서 2009년 매출이 1155억원으로 2008년의 1748억원(수출 1억2000만달러)보다 34%나 감소했으나 2010년에는 1650억원(추정치)으로 거의 회복됐다. 송 대표는 "이미 확보한 수주 물량만 몇 달치 작업물량에 달할 정도"라며 금년 전망을 밝게 보고 있다.

그는 앞으로의 비전을 해외 연구 · 개발(R&D)센터 설립,글로벌 기업 인수 · 합병(M&A) 등 글로벌화를 더욱 촉진하는 데서 찾고 있다. 송 대표는 "특히 일본 등 선진시장에 연구 · 개발센터를 설립하고 기술력이 있는 외국기업의 인수 · 합병을 통해 절삭공구 분야에서의 시장 지배력을 더욱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를 통해 고부가가치 제품 개발에 나설 계획이다.

그가 꿈꾸는 와이지원의 미래는 무엇일까. 송 대표는 "인재와 기술을 바탕으로 고객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회사,혁신적인 사고를 존중하는 미래지향적 회사,성실하고 투명한 경영을 바탕으로 인류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초일류기업을 만들 것"이라고 밝힌다. 이를 바탕으로 '히든챔피언'에서 명실상부한 '챔피언'으로 등극하겠다는 복안이다. 30세에 창업해 이제 환갑을 바라보는 송 대표의 머리에는 서리가 내렸지만 목표를 향한 그의 눈빛은 절삭공구처럼 더욱 예리해지고 있는 듯하다.

김낙훈 중기전문기자 nhk@hankyung.com